[인사이트] 배수람 기자 = "2천 만 민중이 총궐기하여 독립을 부르짖게 되면 한국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허장성세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며 민중의 계몽을 중요시한 서재필 선생은 오늘로부터 66년 전 1961년 1월 5일 숨을 거두었다.
서재필은 김옥균·서광범·홍영식·박영효 등 개화파 핵심인물들과 어울리며 개화사상에 눈 뜬 뒤 개화와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을 꿈꾸었다.
그 일환으로 근대적 군사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던 서재필은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1884년 12월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있던 날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 처단에 나선다.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돌아가 버리자 서재필은 함께 뜻을 모았던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서재필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음독자살하거나 참형을 당했고 두살배기 아들은 굶어 죽었다.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간 서재필은 노동자로 생활하며 서구 학문을 배우고 의과대에 진학해 개인 병원을 차리며 생활했다.
그러던 와중 개화파 동료들의 귀국 종용으로 1895년 12월말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서재필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국민계몽에 다시 열을 올린다.
독립은 곧 교육, 계몽이었던 서재필은 이 수단으로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당시 서재필은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쓰는 것은 상하 귀천이 다 보게 하기 위함이다"라며 대다수 국민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신문을 순 한글로 발행한다.
직접 독립신문에 논설과 각종 기사를 썼던 서재필은 국민의 자주 독립의식을 높이고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내용을 주로 많이 썼다.
뒤이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같은 해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한 서재필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운다.
끊임없이 청년들을 교육·계몽하며 인재 양성에 힘쓴 서재필은 수구파 정부와 열강의 이권침탈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미국으로 추방당한다.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개원해 지내던 서재필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전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며 먼 타국에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규탄을 이어갔다.
1952년 하와의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도 참석하며 독립 외교활동을 펼친 서재필은 이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다.
태평양회의에서 서재필은 "한국 문제는 일본과의 문제만이 아닌 동양, 나아가 전세계 인류의 문제다"라며 "세계 어느 구석에서도 정의가 무시되고 인도가 유린됨을 묵인할 수는 없다"고 독립을 외쳤다.
3·1운동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린 서재필은 궁핍한 생활과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원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광복 이후 83세 나이로 미군정 사령관의 초빙으로 1947년 7월 귀국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한 서재필은 이를 거절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 나이로 영면한다.
배수람 기자 baeba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