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인데도 모처럼 포근했던 날이 지나고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해 12월 24일.
아직 동이 트지 않아 깜깜한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는 불을 밝힌 곳이 많지 않았다.
그중 한 곳인 초소는 김모(72)씨의 보금자리이다. 무려 23년 차 경비원인 김씨는 오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24시간 2교대로 아파트를 지키고 있다.
겨울철에는 혼자 초소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전 7시30분께 주차장으로 청소하러 나선다. 주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밤새 화단에 쌓인 낙엽을 쓸기 위해서다.
두 시간 정도 청소를 하고 나면 어느새 해가 밝는다.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우면 남은 일과가 시작된다. 초소를 지키며 주민에게 온 택배를 대신 받고, 각종 잡일을 돕는 것이 그의 일이다.
육체적으로 크게 힘들지는 않지만, 갑자기 인터폰이 울리거나 택배 기사가 왔다 가는 일이 부지기수라 초소를 비우기가 쉽지 않다. 휴식시간이 적은 것이 가장 힘든 점이다.
김씨는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왜 인터폰을 안 받느냐', '현관문을 왜 안 열어 주느냐'고 따지는 주민들이 많아, 되도록 이동을 최소화하려 한다"고 털어놨다.
그러다 보니 정해져 있는 휴게 시간을 보장받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다.
근무 중 주간 5시간, 야간 4시간을 쉬는 조건으로 최저 시급을 계산해서 한 달에 155만원 정도를 벌지만, 실제 야간에 3시간 남짓 잠자는 시간이 허락된 것 외에는 나머지 시간은 사실상 없으나 마찬가지다.
김씨는 "얼마 전에는 친구가 점심을 먹자고 해 잠깐 밥을 먹고 오겠다고 관리소장에게 말했더니 선심 쓰듯 '이번만 봐준다. 30분만 먹고 오라'고 하더라"며 "휴게 시간도 도둑처럼 써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씁쓸해했다.
이날 기자와 이야기하느라 아침밥을 놓친 김씨는 오전 11시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미리 씻어둔 쌀을 전기밥솥에 올리고 집에서 싸온 반찬과 세탁소 주인이 가져다준 찌개를 데워 '아점'을 먹었다. 보통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이렇게 초소 안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한다.
작은 초소에서 온종일을 보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갑질'하는 주민이다.
재작년 강남의 한 아파트 주민이 '갑질'을 한 것에 분개해 경비원 한 명이 분신자살한 후 경비원 처우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지만 크게 바뀐 것이 없다는 게 김씨 생각이다.
지난해 9월 한 할머니가 경비실에 찾아와 윗집에서 에어컨 실외기선이 정리가 안 돼 내려왔다며 도와달라고 해 그 할머니의 윗집을 찾아간 것은 지금 생각해도 20여년 경비원 인생 최악의 경험이다.
할머니의 착각으로 집을 잘못 찾아가 할머니의 민원을 얘기했는데 그 집 주인으로부터 "내일 당장 모가지를 자르겠다"는 말을 듣고서 수모를 당했다.
"우리 막내아들보다 어린 20대 후반∼30대 남녀가 나한테 삿대질을 하며 쌍욕을 섞어 고함을 치는데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그렇게 욕을 했던 사람이 현직 국회의원 비서관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후 관리사무소에서 문제를 덮으려고 드는 것이 더욱 상처가 됐다. 이들은 관리소에 찾아와 "경비원이 우리를 무시했다. 당장 자르라"고 협박을 일삼았다고 한다. 되도록 주민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관리소장은 시말서까지 받으려 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김씨는 "이런 게 경비원들의 한계"라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나서서 말해줄 사람이 없다. 이전에도 경비 업무가 아닌 잡무를 하면서 불만을 제기해 몇 번이나 해고를 당했다"고 담담히 털어놨다.
아파트 내 페인트칠을 돕지 않는다는 이유, 부당한 월급 삭감에 항의했다는 이유 등으로 그는 아파트를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불황에 지원자가 많다는 이유로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라'는 식으로 나오는 아파트도 많다고 한다.
이처럼 불만을 털어놓으면서도 김씨는 주민들이 지나가면서 꾸벅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어올 때마다 밝게 응대하며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김씨는 "힘들어도 경비원이 아파트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나마 힘이 난다"며 "주민과 방문객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워커, 모자도 내가 준비하고 웬만한 아이들 이름은 다 외우고 있다"며 자랑도 했다.
그는 이어 "단정하고 깔끔하게 다니면 주민들도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도 일부러 찾아와 다시 우리 아파트로 와달라며 부탁을 하기도 한다"며 "그럴 때 가장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며 웃었다.
70살이 넘은 나이에 쪽잠을 자기도 어려운 초소에서 24시간 2교대를 하는 고됨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인 셈이다.
그에게 새해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자 답변은 거침없었다. 바로 '재계약'이다.
김씨는 "내년에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내 가장 큰 소원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거다. 새해 소망도 재계약"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해에 주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덧붙였다.
"경비원이 주민들 아랫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고, 말 한마디 상냥하게 해주면 좋겠어요. 아 참, 택배 좀 제때 가져가 달라고도 말하고 싶어요. 명절만 되면 작은 초소가 택배 짐으로 가득 차 앉을 데가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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