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배수람 기자 = 1972년 12월 27일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취임일과 동시에 '유신 헌법'이 공포·시행된 날이다.
이로써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8년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표면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유신 헌법은 '조국의 평화 통일 지향,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 경제적 평등 이룩을 위한 자유경제질서확립, 자유와 평화수호의 재확인'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등 대통령에게 헌법을 넘어선 권한을 부여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 동원한 수단이 됐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함께 출마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를 비판, 규탄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일련의 사건·사고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가 하면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호텔에 납치·감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박 대통령은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지하고 모든 언론 및 보도, 방송에 사전 검열을 가하는 탄압을 가하면서 유신 헌법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시위도 나날이 거세졌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및 문인 등 시민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이어졌지만 박 전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발동해 이들을 투옥하거나 강제 해직시키며 강압적으로 몰아붙였다.
대표적으로 박 전 대통령은 반유신체제운동을 벌이는 학생 180명을 '공산정권 수립 기도 혐의'로 구속·기소하고(민청학련 사건)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을 영장 없이 체포·불법 감금해 구타 및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부림사건).
인권 탄압이 대외적으로까지 비난을 받게 되고 경제적 악재까지 겹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는 1979년 10·26사태를 기점으로 결국 몰락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박정희 전 대통령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근혜 대통령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임기 내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동안 개헌을 '국정의 블랙홀'이라는 거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던 박 대통령은 지난 10월 23일 "5년 단임 대통령제 헌법은 지금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고 말하며 개헌을 주장했다.
하지만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의혹만 던진 박 대통령의 발언에 항간에서는 '대통령 중임제'와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이 화두로 떠올랐다.
박 대통령의 개헌 논의에 여론의 시선은 곱지 않다. 최근 밝혀진 '비선 실세' 최순실 씨의 청와대 국정 농단 사태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비위 의혹으로 혼란에 빠진 시국을 잠재우기 위한 카드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잇는 '제2의 유신'이라는 평가까지 내놨다.
박 대통령의 개헌 카드가 빛을 잃은 이유는 앞서 지난 2015년 12월 28일 일본국 위안부 졸속 합의와 편향된 역사 국정 교과서, 최순실 국정 농단 등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의 혼란이 가중된 상태에서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
대통령제 개헌으로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대외적으로 일관된 외교정책을 펼치는 등의 이점을 꾀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시국에서 꺼내든 카드가 '개헌'이라면 이는 모래 위에 지은 집, '사상누각'에 그칠 뿐이다.
배수람 기자 baeba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