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정은혜 기자 = 신기술을 발표한다고 기자들을 불렀는데 결국 나온 것은 '아마존+애플+구글'의 짬뽕 제품(?)이었다.
지난달 31일 SK텔레콤은 서울 중구 을지로 본사에서 '인공지능 대중화'를 선언하며 새로운 서비스 '누구'(NUGU)를 언론에 공개했다.
'누구'는 인공지능 'AI 비서'의 일종으로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스피커다. 음성 명령을 인식해 과제를 수행하며 음성으로 명령 수행 결과를 알려준다.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큰 반향을 일으키자 SKT가 서둘러 내놓은 한국판 인공지능인 셈이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날씨에 어울리는 음악을 틀어달라"고 주문할 수도 있고 "거실 조명을 꺼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날씨, 교통, 배달음식 주문 등 말만하면 된다.
시연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구'는 원통형의 흰색 스피커였으며 사회자가 "팅커벨"이라는 이름을 부르자 파란 불이 들어오면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멜론 앱에 접속해 음악을 검색해서 틀어주거나 현재 흘러나오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대답해주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음악을 틀어주거나 날씨나 교통 정보를 말로 알려주는 것은 유용한 서비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는 다소 버벅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간단한 말도 "잘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대답하거나 피자 배달 주문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엉성한 모습에 기자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자가 또박또박 신경 써서 말하면 수초 뒤에 간단한 대답을 하는 모습은 '저 기기를 사면 제대로 작동은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했다.
이에 대해 SKT 관계자들은 "누구의 통신은 와이파이로만 이뤄지는데 현재 와이파이 접속이 많아 다소 원활한 작동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누구'의 탄생 배경에 대해 SKT 박일환 디바이스지원단장은 "우리는 수년 전부터 '소리'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며 "2012년부터 개발자들을 뽑아 서비스를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누구'는 SK의 모든 서비스를 하나로 묶는 '허브'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지만 사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서비스다.
우선 '누구'의 주변기기인 원통형 스피커는 이미 아마존이 2년 전 내놓아 300만대나 판 에코(Echo)와 디자인과 크기 모두 비슷했다.
그 뿐아니라 서비스 내용조차 아마존의 AI비서 '엘리사', 아이폰의 '시리', 구글의 '홈비서'를 짬뽕해 놓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새로울 것이 없었다.
SKT가 아마존의 '에코'를 참고했다고 해도 2년이나 지난 구닥다리 물건(?)을 만들어 언론사 기자들에게 홍보한 대목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론 SK가 이번에 선보인 한국어 자연어처리 기술은 국내 최초이며 한국어 서비스를 준비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지만 야심차게 준비해 내놓은 인공지능에서 SKT가 고민한 '혁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다.
그마저도 아직 준비가 덜 된 게 아닌가 싶은 인상은 계속 느껴졌다.
기자들이 "누구가 명령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인식하느냐. 우리 집에 놀러온 사람이 누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면 개인정보 문제가 생기지 않냐"고 질문했지만 회사 측은 "아직 목소리 구별을 못한다"고 짧게 답했다.
또한 "'누구'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접근하는 빅데이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앞으로 사용자 경험이 쌓이면서 빅데이터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네이버와 구글 등 경쟁업체들이 어마어마한 빅데이터를 갖고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 결과를 제시하고 있는데 SKT는 이제 시작해 나가겠다는 '장밋빛' 포부를 밝혔다.
경쟁 업체들이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으로 저만큼 앞서 뛰어가고 있는데 SKT가 걸음마 수준의 서비스를 내놓고 순진한 소리만 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미 인공지능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은 한참 뒤쳐진 후발주자다.
인공지능 산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알파고 충격' 이후에나 생겼으며 우리가 갖고 있는 원천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서비스를 처음으로 내놓는 일도 아직은 전무하다.
갈 길이 먼 만큼 '팔로워'가 될 것이면 영리한 '패스트 팔로워'가 돼야 하고, 이제는 글로벌 경제가 하나로 묶인 만큼 미국 기업과도 경쟁우위를 차지하려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화된 서비스를 내놓지 못하고 지금처럼 모방하기만 한다면 소비자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년 전 제품을 이름만 바꿔서 재탕해 놓고 대단한 신기술처럼 홍보하는 SKT를 보면 우리나라 4차 산업의 미래가 어둡게 느껴진다.
정은혜 기자 eunhy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