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신궁 장혜진(29·LH)이 양궁을 시작한 건 대구 대남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97년이었다.
IMF가 한반도를 강타한 그해, 장혜진은 친구의 권유로 활을 들었다.
어린 장혜진은 많은 일을 겪었다. 부모님이 이혼해 아버지 밑에서 생활하게 됐고 어린 세 여동생을 보살펴야 했다.
1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난 장혜진의 아버지 장병일 씨는 "안쓰럽고 짠했다"라고 말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장혜진은 씩씩하고 활발하게 지냈다. 장병일 씨는 "혜진이는 명랑한 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장혜진도 숨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못생긴 두 손'이었다.
어린 소녀의 손은 쉴 새 없이 활시위를 퉁기는 바람에 항상 퉁퉁 부어있었다. 손가락엔 굳은 살이 배겼고, 많은 상처를 달고 살았다.
장병일 씨는 "당시 혜진이는 손 내미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악수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장혜진은 양궁선수로서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경화여중, 대구체고에서 양궁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리 두각을 내진 못 했다.
신궁의 나라, 한국엔 활을 잘 쏘는 선수들이 차고 넘쳤다.
그는 20대 중반까지 '그저 그런 선수 중에 한 명'이었다.
그는 대학교 4학년 때 첫 태극마크를 달았고, 27살이던 2014년에야 월드컵 대회에서 첫 개인전 금메달을 딸 정도로 늦게 만개했다.
2012 런던 올림픽 때는 큰 시련을 겪었다. 올림픽 선발전에서 3위와 0.5점 차이로 밀려 간발의 차로 런던 땅을 밟지 못했다.
그러나 장혜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눈물을 삼키고 절치부심해 리우올림픽 선발전을 당당히 통과했다.
장병일 씨는 리우로 떠나는 딸을 본체만체했다. 부담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장 씨는 "그냥 편하게 있다 돌아오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장 씨는 애써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세계 랭킹 1위 최미선이 개인전 금메달을 딸 것 같았다. 최미선의 페이스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혜진은 기적처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 세계가 지켜본 북한 강은주와의 16강 남-북 대결을 이겨냈고, 기보배와 4강전에서 3점을 쏘는 큰 실수를 딛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독일의 리사 운루후를 상대로 승리해 올림픽 2관왕을 달성했다. 장혜진은 시상대에서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못 생겨서' 부끄러워했던 두 손을 높이 들고 관중들을 향해 마음껏 흔들었다.
1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금의환향한 장혜진은 "어렸을 때 손이 못 생겨서 속상했다"라며 방긋 웃더니 "이젠 두 손이 자랑스럽다. 영광의 흔적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두 손은 꽃다발 더미 한 아름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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