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에서 24명의 사상자를 낸 '광란의 질주' 교통사고를 계기로 변별력을 잃은 국내 운전면허 시험 제도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편의 확대를 명목으로 운전면허 시험이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간소화된 이후 운전면허증은 일명 '물 면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누구나 어렵지 않게 따는 국가 공인 자격증이 돼 버렸다.
쉬워진 시험은 준비되지 않은 운전자를 도로 위로 내모는 꼴이 됐고, 이로 인한 사고가 잇따르면서 사회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정부가 뒤늦게 운전면허 시험 개선안을 발표했지만,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는 방향의 선진국 수준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단순히 면허 취득 전 운전교육 시간만을 늘릴 게 아니라 운전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 쉬워진 면허시험이 교통사고 증가 초래
정부는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면허시험 간소화 정책을 내놨다. 간소화로 면허 취득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여 국민의 부담을 덜겠다는 이유였다.
이에 운전면허 장내 시험에서 곡선과 굴절 코스 등이 사라졌고, 교육 기간도 60시간에서 13시간, 평가항목도 15개에서 6개로 대폭 줄었다.
면허 취득에 필요한 교육이 학과 5시간·기능 2시간·도로주행 6시간 등 13시간에 불과하니 소요 시간으로만 따질 경우 1박 2일만 집중하면 면허를 딸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실제 1박 2일 만에 면허를 딸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면허 따기가 '식은 죽 먹기'라는 점에서 '물 면허'라는 말이 나왔다.
이런 소문이 중국에까지 퍼져 시험을 보러 원정 오는 중국인이 늘어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실제 단기체류 중국인의 면허 취득 건수는 2011년 53건에 불과하던 게 2012년 150건, 2013년 455건, 2014년 4천662건으로 급증했다.
이쯤 되자 중국 상하이시는 안전상의 문제로 지난해 초부터 한국에서 운전면허를 딴 중국인에게 자국 면허로 교환해주지 않기로 했다. 우리나라가 국제적 망신을 당한 것이다.
중국 상하이시의 우려처럼 쉬워진 면허시험은 국내 교통사고 증가로 이어졌다.
간소화 이전 69.6%였던 장내기능 시험 합격률은 92.8%로 증가했지만, 주행시험 합격률은 78.7%에서 58.5%로 떨어졌다. 실제 운전에 필요한 기술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채 도로로 나서는 운전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찰과 손해보험사, 버스공제조합에 접수된 교통사고 통계인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 결과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TAAS에 등록된 신규면허 취득자 1만명 당 교통사고 건수 추이를 보면 간소화 3년 전 99.18건, 2년 전 92.39건, 1년 전 79.6건으로 감소세가 뚜렷했고 간소화 1년 후도 61.45건으로 비슷한 양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간소화 2년 차 61.43건으로 감소세가 주춤하더니 3년 차(63.2건)부터는 전년 대비 1.77건 늘어 오히려 증가세로 돌아섰다.
◇ 간소화 5년 만에 면허시험 제도 강화 나선 정부
'물 면허' 논란이 거세지자 경찰청은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을 개정, 이르면 올해 11월부터 면허시험 제도를 강화하기로 했다. 간소화 조치 이후 5년여 만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장내기능 시험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현재는 50m를 주행하면서 차량 조작 능력과 차로 준수 여부, 급정지 등만 평가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주행거리가 300m 이상으로 길어지고 좌·우회전, 신호교차로, 경사로, 전진(가속), 직각주차(T자 코스) 등 5개 평가항목이 늘어난다.
이 가운데 T자 코스는 방향전환보다는 주차 능력을 검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도로 폭이 과거보다 훨씬 좁아진다.
장내기능 시험을 어렵게 한 것은 도로주행 연습에 앞서 장내기능에서 운전에 필요한 항목을 충분히 숙달하게 함으로써 초보운전자의 도로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취지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문제은행 방식의 학과시험은 730문제에서 1천문제로 확대된다.
도로주행 시험은 평가항목이 87개에서 59개로 다소 줄어든다. 하지만 도로주행 검정원의 주관적 의견이 개입될 소지가 많은 수동 채점 항목을 62개에서 34개로 줄여 객관성을 높이기로 했다.
운전전문학원에서 받는 의무교육은 13시간으로 유지되지만, 학과교육은 5시간에서 3시간으로 2시간 줄고, 장내기능 시험은 현행 2시간에서 4시간으로 늘어난다.
교육시간이 늘어난 만큼 학원비는 현재 평균 40만원 정도에서 47만∼48만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 면허 취득 기간 2∼4년…선진국은 접근법부터 달라
정부의 면허시험 개선안이 실효성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교통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간소화 이전 제도를 답습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물 면허' 논란을 의식한 타협안에 불과하다고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운전면허 제도에 대한 접근법부터 잘못됐다고 입을 모은다.
운전이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인 만큼 대다수 선진국은 면허 취득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다.
우선 의무교육 시간부터 우리나라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OECD 회원국의 의무교육 시간은 우리나라보다 4배 가까이 많은 평균 50시간이다.
특히 교육과 시험을 철저히 분리해 운영한다.
대부분 초기에는 임시면허나 관찰면허를 주고 운전자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운전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 정식면허를 발급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 면허시험을 통과하면 임시면허를 주고 1년간 관찰단계를 거친다. 이 기간에 사고나 법규 위반을 하지 않으면 2차 임시면허를 주고 또다시 1년간 관찰한다.
이 과정을 모두 거쳐야만 정식면허가 발급된다. 정식면허를 받기까지 최소 2년이 걸린다는 얘기인데 평균적으로는 4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같은 방식의 운전면허 제도를 운용하는 프랑스의 평균 면허 취득 기간은 3년, 독일은 2년이다.
일부에서는 이원화된 현행 운전면허 제도를 문제 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국내 운전면허 시험은 국가 면허시험장에서만 시행하다가 1995년 응시자 적체 현상이 일자 운전교육기관인 운전전문학원제를 도입, 검정권을 부여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 사설학원에 면허시험을 맡긴 게 변별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김덕룡 한국손해보험협회 수도권본부장은 "운전면허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운전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과 그 결과에 따른 엄격한 법 집행"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운전 교육시간을 늘리거나 시험을 까다롭게 하는 식의 단편적인 대책은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며 "이원화된 현행 운전면허제도를 개선하는 등 제도권 안에서의 강력한 제재 수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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