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숙 할머니 / 연합뉴스
지난 2월 낙상사고로 중상을 입고 한국으로 이송될 예정인 하상숙(89) 할머니는 중국에 남은 유일한 한국 국적의 위안부 피해자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예산에서 자란 하 할머니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중국 우한(武漢)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견뎌냈다.
이제 하 할머니는 구순을 앞둔 병상의 노인으로 바뀌어 10일 고국 땅을 다시 밟는다.
낙상 사고로 현재 중국 우한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인 하 할머니는 현재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은 후 인공호흡기를 꽂고 있어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 할머니는 낙상사고를 당하기 1개월 전인 지난 1월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17세 때인 1944년 빨래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당시 하 할머니는 "군속(군무원)이라고 하나? 나이 든 사람이 끌고 간 거지. 산에서 나무하고 있던 나를…"이라며 자신의 한 많은 삶을 전했다.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모집책에 끌려 서울, 평양, 단둥(丹東), 톈진(天津), 난징(南京)을 거쳐 약 3개월 만에 중국 우한의 적경리 위안소로 끌려갔다.
쇠창살로 둘러싸인 위안소에서 하루에 10∼15명을 상대해야 하는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을 겪어야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와 가족이 그리웠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고통스런 현실 때문에 편지를 쓸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2013년 국제심포지엄에서 위안부 피해 증언을 하고 있는 하상숙 할머니
위안소에서의 끔찍한 생활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끝이 나지만 할머니는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가나'라는 생각에 귀국하지 않은 채 중국에 남았다.
하 할머니는 "일본이 지고, 여기 남은 사람은 45명이었어요. 남자는 6명이고 전부 여자들…. 죽은 사람도 있고, 물에 빠져 자살한 사람도 다 있어요. 또 남조선, 북조선으로 갈려서 못 가게 됐어요"라고 전했다.
심신이 크게 상해 중국에서 살길이 막막했던 하 할머니는 이후 현지에서 딸이 셋 딸린 중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으나 다행히 남편과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잘 해줬다고 했다.
1962년 방직공장에 취직, 25년간 일하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어린 딸 셋을 건사했다. 1994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막내딸과 함께 지내왔다.
중국 국적을 얻지 않고 해방 후 부여된 조선 국적의 '하군자'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사실상 무국적 상태를 유지해왔다. 남북 분단과정에서 조선 국적은 모두 북한 국적으로 분류됐기 때문이었다.
하 할머니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7년여가 지난 1999년 주변의 도움으로 한국 국적을 회복하며 '하상숙'이라는 본명도 다시 갖게 됐다. 2003년에는 고향 땅을 다시 밟기도 했다.
2년 가량 한국에 머물던 할머니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도 여러 번 참가했고 국제회의에 위안부 피해 증언자로도 수차례 참석한 바 있다.
그러던 할머니는 중국에 둔 딸들의 권유에 따라 다시 중국에 돌아와 지내다가 최근 이웃과 말다툼을 벌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하 할머니는 현재 중국에 남은 한국계 위안부 할머니 3명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 국적을 갖고 여성가족부의 위안부 피해자로도 등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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