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조세진 기자 =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독립운동을 위해 힘썼던 안창호 선생.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독립운동을 외친 도산은 투옥 후유증으로 해방을 보기 7년 전, 경성제국대학교 대학병원에서 초라하게 임종을 맞게 된다.
그의 생전 모습은 사진에 담겨 여전히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지난 10일 서거 83주기를 맞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생전 얼굴의 변화 모습이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공개된 사진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감시 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의 신상을 정리한 '대상인물카드'에 붙여진 사진이다.
첫 번째 사진은 1919년 무렵 도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역임할 당시의 사진이다.
말끔한 차림의 빼어난 그의 외모가 눈에 띈다.
이전에 비해 더 마르고 야위었지만 깔끔한 양복 차림을 하고 있는 도산의 모습이 담긴 두 번째 사진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일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수감된 때의 사진이다.
1937년도에 찍힌 세 번째 사진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이 사진은 동우회 사건으로 재차 체포된 도산이 혹독한 심문을 받고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윈 도산의 모습은 당시 혹독한 옥중 생활을 짐작게 한다.
일본은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그를 모진 고문으로 괴롭혔다.
당시 일본 간수들은 고문으로 몸 곳곳에 멍이 든 선생을 "기아나이야츠(더러운 자식)"라고 불렀다.
출소 후에도 선생은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또다시 옥살이를 했다. 두 번의 옥살이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선생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 이전과 그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은 현재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지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