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성동권 기자 = 흔히 북한의 만행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연평도 포격과 같은 군사 도발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군사적 도발 이외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을 강제로 납치해가는 '납북' 사건을 자행해왔다.
그럴 때마다 정부와 국제 사회는 강도 높은 비판을 하며 송환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번번이 요구를 묵살했다.
오늘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북한의 납북 사건들을 정리해 소개한다.
1. 1969년 KAL기 납북 사건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출발해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여객기 YS-11A에는 승무원 4명과 승객 46명이 타고 있었다.
그때 승객을 가장한 북한 간첩 조창희가 권총을 들고 조종사실에 침입하면서 여객기는 북한 선덕 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 북한은 비행기 납북 사건에 대해 두 조종사에 자진 입북이라는 간단한 보도만 내놓았을 뿐이었다.
이후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북한 당국은 1970년 2월 14일 승객과 승무원 50명 가운데 39명만 송환됐다.
이때 송환되지 못한 11명은 5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2. 1958년 창랑호 납북 사건
1958년 2월 16일 부산발 서울행 대한국민항공사 소속 창랑호가 상공에서 납치돼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했다.
당시 비행기에는 미국인과 독일인을 포함해 29명의 승객이 탑승해있었다.
북한은 언론을 통해 "대한국민항공사가 자진 월북을 했다"라고 거짓 발표를 했다.
하지만 정부의 노력과 UN의 협조 덕분에 모든 승객과 승무원 총 26명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3. 1979년 고상문 납북 사건
1979년 노르웨이에서 해외연수 중이던 수도여고 지리교사 고상문씨가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
당시 외무부는 고씨가 여행 중 여권이 든 가방을 잃어버린 뒤 택시를 타고 대사관을 찾았지만, 공교롭게도 북측 대사관에 잘못 들어가게 되면서 현장에서 억류된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고씨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는 20여 년 가까이 국가와 북한을 상대로 남편의 송환을 호소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4. 1978년 신상옥·최은희 납북 사건
1978년 1월 14일과 7월 19일 배우 최은희와 그의 남편 영화감독 신상옥이 각각 북한 공작원에 의해 홍콩에서 강제 납북됐다.
납북된 뒤 신상옥·최은희는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우고 영화 제작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의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묵고 있던 두 사람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미국 대사관에 은신을 요청함으로써 납북된 지 8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탈출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기자 회견을 통해 북한의 문제를 폭로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