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전형주 기자 =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88주기를 맞아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을 기념한 경축식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 대장 등을 사살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는 이후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다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같은 해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조국의 광복을 못 보고 순국한 선열은 윤 의사만이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애국지사가 이 시기 혹독한 고문을 받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독립운동이 이뤄진 만주를 포함해 서울 도심에서도 고문은 자행됐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지하에는 애국지사를 감금하고 고문하는 고문실이 따로 있기도 했다.
이 고문실은 25년 전인 1995년 8월 9일 청사를 철거하다가 발견됐다. 지하에서 발견된 고문실에서는 각 방에 배수로까지 설치돼 있었다.
광복회에서는 이 배수로를 두고 물고문 또는 애국지사의 피를 닦아내기 위한 시설로 추정했다. 30년 경력의 전직 서대문형무소 교도관도 이 시설이 고문·감금실이라고 봤다.
고문실은 건물에 있는 유일한 지하 공간이었다. 89.25㎡(약 27평) 크기인 이곳은 4개의 방과 복도로 이뤄졌다.
각 방은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0.2평 독방과 5평, 2평 크기였다. 각 방에 설치된 14cm의 두꺼운 철판문은 방음을 위해 나무와 모래로 속이 채워져 있었다.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이곳은 1995년 김영삼 정부 들어 철거됐다. 당시 김 대통령은 "겨레의 얼을 되살린다"며 조선총독부를 허물었다.
청사 철거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뒤따랐다. 근현대사의 정치·사회·문화를 담고 있는 건물이고, 철거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다만 김 대통령은 잇따르는 지적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빠르게 해체됐고, 결국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이 됐다.
청사가 완공된 지 70년,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한 지 50년째 되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