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7일(일)

101년 전 오늘(2일), 나라 지키려 조선 총독에게 폭탄 던진 '백발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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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천소진 기자 = 지난 1919년 9월 2일, 부임식을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로 폭탄 하나가 날아왔다.


빗나간 폭탄은 사이토가 탄 마차의 바로 뒤차를 맞히면서 일본인 취재기자 2명을 포함한 3명이 사망,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일본 경찰들은 즉시 강우규를 체포했으나 '설마 이 노인이...'라는 생각에 그를 풀어줬다. 당시 그의 나이 6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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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7월 14일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강우규는 한의사 겸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한 강우규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며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해갔다.


1919년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며 강우규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지만, 점차 시들해지자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식민정책을 변경하고자 조선 총독을 교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새롭게 임명될 조선 총독을 처단하기로 했다.


인사이트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gettyimagesBank


8월 초부터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모으던 강우규는 9월 2일에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서 다니며 얼굴을 익혔다.


남대문역 부근의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긴 강우규는 매일 역전에 나가 주변을 답사하며 폭탄 투척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 당일, 미리 봐둔 위치에서 기다리던 강우규는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돌아온 사이토의 마차로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이 빗나가며 뒤차를 맞혔고 3명 사망, 조선총독부 관리 등 37명에 중경상을 입혔다. 정작 사이토는 파편 몇 조각이 벨트에 박혔을 뿐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당시 일본 경찰들은 백발의 노인인 강우규가 이런 일을 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아 풀어줬고, 혼비백산하는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온 강우규는 다시금 의거를 계획했다.


강우규는 보름이 지난 17일 일제 앞잡이 김태석에게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20년 11월 29일 사형이 집행되던 날, "감상이 어떠냐"는 일제 검사의 말에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 단두대 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고 말하며 형장의 이슬이 됐다.


나이와 상관없이 오로지 독립만 생각하며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한 강우규의 기개는 오늘날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정부는 강우규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