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김다솜 기자 =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겁던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겨우 22살의 젊은 대학생 박종철 군이 잔인한 고문으로 숨을 거뒀다.
수많은 민주화운동 인사를 잡아 경찰의 수사를 가장한 고문을 거쳐 거짓 자백을 강요하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그곳에서는 폭행부터 시작해 물고문, 전기 고문, 성 고문 등 끔찍한 일들이 자행됐다.
그리고 55년 전 오늘(1일)은 '만우절'에 태어나 자신의 희생으로 한국 사회에 민주화라는 선물을 주고는 '거짓말'처럼 떠난 故 박종철 열사가 태어난 날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열사는 학교 인근 하숙집 골목에서 강제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고문을 받았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좁고 깜깜한 방에서 반복되는 고문을 당하다 끝내 숨진 이유가 무엇일까.
학생회장을 맡을 만큼 굳세고 총명했던 박종철 열사가 체포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된 이유는 그가 박종운 민주 운동가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사관들은 박종운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박종철의 옷을 벗기고 욕조로 끌고 가 끔찍한 물고문을 반복했다. 끝내 박종철은 22살의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의 사망에 대한 경찰의 발표가 이상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핵심 인물인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은 기자회견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말도 안되는 궤변과 함께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다.
당시에도 남영동 대공분실은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인 고문이 자행되기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다.
수많은 고문 중 박종철 열사는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수사관들은 욕조 등에 물을 받은 뒤 박종철 열사의 몸을 결박하고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어 숨을 못 쉬게 했다.
다리를 들고 거꾸로 물속에 처박거나 배를 보이도록 자세를 잡고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사관들은 물고문뿐만 아니라 실제 다양한 고문을 자행했다.
각목 등 각종 도구를 이용한 폭행, 수치심을 심어주는 옷 벗기기, 잠재우지 않기, 육체적으로 가장 끔찍한 고문 중 하나라는 전기 고문 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런 잔혹한 고문에 박종철 열사는 고문 도중 질식으로 숨을 거뒀다.
대학생을 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진실을 축소 은폐하려 한 정권에 분노한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독재자'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냈다.
박종철 열사의 희생으로 되찾은 자유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되찾고 싶었던 22살 대학생 박종철 열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