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이하린 기자 = 지난 3일 저녁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박 명예회장은 1932년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해군에 자원 입대해 참전용사로 활약했다.
군 제대 후에는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 1960년 한국산업은행 공채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두산그룹에는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처음 발을 들였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친 뒤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항상 주변을 아우르는 '큰 어른'이었던 박 명예회장은 인재를 중시한 경영으로 오늘날 '글로벌 두산'의 기틀을 닦았다. 지금까지 그가 세운 찬란한 기록을 들여다보자.
1. 6.25전쟁 참전용사…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
박 명예회장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상황임에도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다.
그는 통신병으로 비밀훈련을 받고 암호 취급 부서에 배치된 후,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용한 성품 때문에 이 같은 공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뒤늦게 인정을 받아 2014년 5월 6.25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받았다.
2. '인재' 중심의 경영, 그리고 '인화'를 중시했던 박 명예회장
"두산의 간판은 두산인들입니다. 나야 두산에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이지만 두산인은 영원합니다", "나는 무엇보다 사람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잘나고 못나면 얼마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노력하는 사람, 그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합니다", "기업은 바로 사람이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박 명예회장이 생전에 한 발언에는 '사람'에 대한 그의 가치관이 잘 담겨 있다.
'모든 사원이 일생을 걸어도 후회 없는 직장이 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그는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라고 항상 강조했다.
또한 박 명예회장은 인화(여러 사람이 서로 화합하는 것)를 강조했다. 그는 "인화로 뭉쳐 개개인의 능력을 집약할 때 자기실현의 발판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 나온다"고 말했다.
3. 새로운 시도, 부단한 혁신…'글로벌 두산' 기틀 닦아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 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는 별도로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두산그룹 출신 한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새로운 경영 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의 혁신도 빼놓을 수 없다. 박 명예회장은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 작업을 주도했다. 그의 선제적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4. 두산에서의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
박 명예회장은 1960년 4월 두산그룹이 아닌 한국산업은행 공채 6기로 입행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라고 강조한 선친 박두병 초대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3년 동안 은행 생활을 한 그는 1963년 4월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아랫사람의 노고를 먼저 배운 박 명예회장은 언제나 겸손했다. 어려서부터 선친에게서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그는 "내가 먼저 양보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가훈을 '수분가화(守分家和)'로 삼았을 정도다. '수분가화'는 '자신의 분수를 지켜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뜻이다.
박 명예회장은 형제와 자녀들에게 '수분가화'라는 붓글씨가 적힌 액자를 선물하면서 분수에 맞는 삶을 강조하기도 했다.
5. 말보다는 '경청'의 리더십 보여준 '침묵의 거인'
박 명예회장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늘 결정의 중심에 있었지만 먼저 입을 열지 않기로 유명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자신의 뜻을 짧고 간결하게 전했다. 사업적 결단의 순간 때도 그는 실무진의 의견을 먼저 경청했고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어 방향을 정했다.
한 번 일을 맡기면 상대방을 신뢰하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믿음 경영'을 실천한 고인에 대해 두산 직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고, 다른 이의 의견을 먼저 듣고 존중하던 '침묵의 거인'이셨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큰 어른'이셨다"라고 말한다.
두산 직원을 포함해 박 명예회장 곁에 머물렀던 많은 이들이 그를 '침묵의 거인'이라고 기억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