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전년부터 경상도 연안에 투입돼 왜구를 여러 차례 패퇴시킨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2~3월 웅포(熊浦, 지금의 경남 진해)에서 7차례나 큰 승리를 거둔 이후였다.
당시 그 지역 군비태세를 관할하던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은 이순신에게 '화공을 사용해 왜구를 소탕하라'고 요청하며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이에 이순신은 4월1일 답장을 보내 수군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판단을 정중히 밝힌다.
'애초 생각은 진해가 부산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흉악한 적들이 요새를 지키고 나오지 않는데, 명나라 군사가 남하하는 날 수군을 거느리고 곧장 부산으로 가면 필시 후방을 돌봐야 하는 걱정이 들 것이므로 그때 이를 불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형세는 명군이 오랫동안 지체하고 있으니 만약 저들의 배를 불사르더라도 배만 없앨 뿐이고 왜구는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영감께서 알려주신 계책이 이러하니 어찌 시행될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은 명나라 군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화공을 쓰더라도 왜구를 소탕할 수 없으므로 김성일의 계획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리라고 판단해 이같이 반론했다. 그러면서 이런 심경을 털어놓는다.
'팔방 가운데 호남이 조금 완전하지만, 도내 장정들은 모두 바다와 육지의 전투에 나아가고 노약자들도 수송하는 일에 피폐해 있습니다. 석 달의 봄날이 이미 지나고 남쪽의 이랑은 적막하니, 변란을 겪은 곳보다 더 심각합니다. 백성은 군대와 식량을 하늘로 여기고 있으니 큰 후환이 있을 것이며, 회복할 수 있는 대책도 희박한 것입니다. 매우 걱정됩니다. 가까운 시일에 경내로 돌아가서 각 함선의 군사들을 씨 뿌리기에 진력하게 하고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듣는 대로 즉시 바다에 내려가기를 꾀하고자 합니다.'
이 편지는 경북 안동 김성일 종가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입수해 자료화했다. 이순신의 친필 원본이 아니라 이후 김성일 집안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가 옮겨 적은 전사본(轉寫本)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적은 없다.
편지를 발굴한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현장 지휘관으로서 누구에게든 자신의 판단을 명확히 밝히고, 더불어 백성의 고충을 늘 생각하면서 전쟁 중에도 농사를 지어 식량을 확보하게 한 이순신의 철저함이 엿보이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난중일기'의 여러 판본을 비교 검토해 최초로 교감완역본을 내기도 한 노 소장은 충무공 탄생일(4월28일)을 앞두고 최근 출간한 '이순신의 리더십' 개정판에서 이 편지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유학의 근본인 오덕(五德, 인의예지신)을 중심으로 이순신의 인간상을 분석한 책이다. 인(仁)을 근본으로 한 충효정신, 유비무환 정신, 뜻을 관철하는 추진력,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등이 이순신의 미덕으로 제시된다.
인사이트 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