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이하린 기자 = "나는 우리 동포들에게 의복을 주자고 결심했다. 질긴 의복을 우리 동포들에게 입히고, 부녀자들을 빨래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양말 뒤꿈치를 꿰매는 고역의 생애를 편하게 살 수 있는 생애로 전환시키고 싶다!"
'현대판 문익점' 故 이원만 코오롱그룹 선대회장
고려 시대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 선생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일본에서 나일론을 들여온 고(故) 이원만 코오롱그룹 선대회장이 있었다.
이원만 선대회장은 한국 섬유 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1904년생인 그는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작업 모자를 생산해 크게 성공하는 등 일찌감치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였다.
우연히 접한 '나일론' 한국에 들여온 이 선대회장
그러던 중 이 선대회장은 우연히 '나일론'을 접하게 됐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며, 값싸고 질기기까지 한 나이롱은 그야말로 '신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국 전쟁이 끝난 뒤 조국으로 돌아와 1954년 '개명상사'를 설립했다.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나일론을 수입 판매하기 시작했다.
사업이 잘 되자 3년 후인 1957년에는 대구 신천동 일대 뽕나무 밭에 '한국나이롱주식회사(지금의 코오롱그룹 전신)'를 설립, 공장을 세우고 직접 나일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은 매일같이 남편과 자식의 의복을 빨고 구멍 난 양말 뒤꿈치를 수시로 꿰매야 했다.
이 선대회장이 들여온 질기고 튼튼한 화학섬유 나일론은 문익점 선생의 목화에 버금가는 의생활 혁명을 몰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도 '화학 섬유 시대'가 열렸다.
한국을 '수출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 다해
이 선대회장은 수출에도 눈을 돌렸다. 한국나이롱주식회사는 홍콩, 이란, 아프리카, 미국, 동남아 등 해외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또한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오늘날의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설립을 주도했다. 한국이 공업 국가로 나가가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그곳에서 이 선대회장은 섬유류, 플라스틱, 피혁, 전자기기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수출산업을 이끌었고, 한국을 수출 강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대통령상, 1977년 은탑삽업훈장을 수여했다.
이 선대회장은 또한 제 6~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경제 관련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경제인 겸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1972년에는 한국나이롱과 한국폴리에스텔(1971년 지어진 공장)을 통합해 '코오롱그룹'을 만들었고, 1977년 아들인 故 이동찬 명예회장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줬다.
이후 이동찬 명예회장은 다시 아들 이웅열 전 회장에게 자리를 내줬으나 이 전 회장은 최근 퇴임 의사를 밝히고 창업의 길로 들어선다고 공표한 바 있다.
국가와 개인을 모두 배불리는 '상지상'의 정신 강조
이 선대회장이 강조한 건 '상지상(上之上)'의 정신이었다. 수평선 위는 '상(上)'이요 아래는 '하(下)'인데, 국가와 개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사업이 바로 '상지상'이라는 것이었다.
나일론을 통해 국가와 개인 모두를 배불리는 사업을 하고자 했던 이 선대회장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경영 철학이 있었다.
이 선대회장은 1994년 타계했지만 코오롱 그룹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코오롱은 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무역, 건설, 석유화학, 관광, 운수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 중이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면서 말이다.
이 선대회장이 남긴 '상지상'의 정신이 지금도 코오롱 그룹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