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악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명령으로 생산된 '비틀'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귀여운 디자인으로 전 세계 많은 운전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자동차 '비틀(Beetle)'.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Volkswagen)'을 있게 한 이 자동차가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폭스바겐과 메가 히트 브랜드 비틀은 '국민차'를 만들려고 했던 히틀러의 야망이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3년 1월 독일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서민'들을 위한 자동차가 전무하다는 것을 알고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성능은 좋은 '국민차'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1931년 'Dr. Ing. h. c. F. Porsche GmbH'라는 자동차 회사(포르쉐의 모태)를 설립한 천재 자동차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박사를 불러 아래와 같은 자동차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어른 2명과 어린이 3명이 탑승 가능하며, 연비는 리터당 14.5km 이상, 쉬운 정비, 가격은 1,000 마르크 이하(당시 오토바이 한 대 값)를 충족 시켜라!"
저렴하며 성능 좋은 '국민차' 만들려던 히틀러의 야망이 빚어낸 '결과물'
'카데프 바겐(Kdf-Wagen·즐거움을 통한 힘-자동차)'이라고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포르쉐 박사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프로젝트 명이 마음에 안 들었던 그는 히틀러에게 '국민(Volks) 자동차'라는 뜻의 '폭스바겐(Volkswagen)'을 제안하고, 폭스바겐은 1937년 설립된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의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게 된다.
폭스바겐 프로토타입은 1936년 10월에 완성됐다. 프로토타입은 수평대향 4기통 1.1ℓ 엔진에 최고 속도 98km/h, 최대 출력 26.5마력을 지녔으며 간단한 구조와 우수한 내구성을 자랑했다.
양산형 모델은 1938년 독일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나왔다.
처음에 히틀러는 폭스바겐의 디자인이 불만족스러웠으나 70일간의 성능 테스트 결과를 보고 크게 만족해했고, 본격적인 생산을 위한 공장 건설을 지시했다.
'천재와 악마의 동맹'이 빛을 본 순간이었다.
천재와 악마의 동맹…본격적인 생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지만 이 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터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자동차 생산 공장이 군용 자동차 생산 공장으로 바뀌게 된 것.
결국 폭스바겐의 본격적인 생산은 전쟁이 끝난 1945년에 이뤄졌고, 이후 딱정벌레를 닮은 외형 때문에 붙여졌던 별명 '비틀'로 불리며 미국 등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국민차' 폭스바겐, 즉 비틀은 50년대,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며 디자인 및 성능이 조금씩 변경되기는 했지만 포르쉐 박사가 만든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2003년 7월 단종되기까지 무려 2,153만대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단일 모델로는 세계 최다 판매 기록이다.
이후 비틀은 2세대 '뉴비틀'과 3세대 '더비틀'로 명맥이 이어졌고, 내년 출시되는 '비틀 파이널 에디션'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비록 비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한때 '전 세계인의 발'이라 불릴 정도로 자동차 산업에 큰 영향을 줬던 자동차는 분명하다.
탄생의 배경이 히틀러의 '명령'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또한 폭스바겐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용성을 강조하며 폭스바겐, 아우디,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포르쉐 등 고급 브랜드를 가진 거대 자동차 그룹으로 거듭났다.
전 세계 자동차 산업에 큰 영향을 줬던 자동차 '비틀'
한편 비틀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포르쉐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동차와 탱크를 군수 물자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전범으로 체포돼 20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유의 몸으로 1949년 독일로 돌아온 뒤에는 아들과 함께 포르쉐 재건에 나섰고, 지금의 포르쉐를 있게 한 여러 모델을 만들며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발휘했다.
포르쉐 박사는 1950년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이듬해 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