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권길여 기자 = 국민의 80%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김영삼 정권의 말미인 1990년대 후반.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진입했다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동시에 'OECD에도 가입했다'고 널리 알렸다.
이따금씩 경제 위기설이 돌 때도 "한국 경제는 기초가 튼튼하다"며 "경제 호황을 믿어 의심치 말라"고 눈 가리기 아웅 식으로 대처했다.
그렇게 우리 국민은 뒤통수를 크게 맞았다. 소문으로만 돌던 외환 위기는 사실이었다.
경제가 호황이라는 정부 말만 믿고 '어음' 거래를 해 부도를 맞은 가장들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다,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외화보유액이 낮았던 정부는 국가 부도 위기 앞에서 IMF(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리며 일반 국민보다 '재벌' 살리기를 선택했다.
소박한 행복을 그리던 가장들의 꿈을 짓밟아 버린 이때를 우리는 'IMF 사태'라 부른다.
'국치의 날'이라고 불릴 만큼 뼈아픈 'IMF 사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굴욕적인 날이지만, 이날을 제대로 그려낸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나와 눈길을 끈다.
위기를 막으려는 자 vs 사익을 챙기려는 자 vs 힘없는 시민
1997년 말 국가부도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한국에는 몇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나라의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과 위기를 기회로 삼고 베팅하는 사람, 그리고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 한 평범한 사람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팀장인 한시현(김혜수 분)은 모두가 경제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이야기할 때 국가부도 위기를 가장 먼저 예견하고 대책을 세운다. 그는 보수적인 관료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에 맞서 강한 신념과 전문성으로 위기 대응에 앞장서는 한편, 서둘러 국민에게 알리고 대비할 수 있게 소신을 피력하는 인물이다.
반면 국가의 위기를 이용해 야욕을 채우려는 사람도 있다.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은 겉으로는 한국 경제의 새 판을 짤 것을 주장하지만 뒤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평범한 시민이지만 이때를 이용, 계급 상승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도 존재한다.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분)은 나라가 망해가는 징조를 빨리 파악, 달러 사재기와 풋옵션, 강남 중소형 집 사재기 등 역베팅으로 꼼꼼하게 잇속을 챙긴다. 하지만 윤정학은 무능한 정부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시민을 보며 연민을 느끼는 인간적 캐릭터로, 재정국 차관과는 다르다.
마지막 캐릭터는 외환 위기의 고통을 맨몸으로 맞았던 평범한 소시민 갑수(허준호 분)다. 밤낮없이 가족들을 위해 일했지만 그릇 공장 부도로 큰 빚을 지게 된 갑수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갑수는 당시의 평범한 소시민을 대변하며 관객의 먹먹함과 안타까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경제 스릴러'가 등장했다
모두가 아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다루는 영화는 자칫 잘못하면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2시간 내내 심심할 틈 없이 흘러가 '시간 순삭'을 느끼게 해준다.
외환 위기 앞에서 IMF 구제금융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는 한시현과 재정국 차관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옷 벗을 각오로 소신껏 일하는 한시현의 모습에 감동하다가도, 국가 위기 앞에서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재정국 차관의 모습에 금세 분노하게 된다.
결과야 이미 지나온 현대사이기에 뻔히 알고 있지만, IMF 사태를 직접 겪은 대다수의 중장년에게는 다시 봐도 충격적일 정도로 공감을 자아낸다.
실제 몇몇 관객은 괴로웠던 과거가 떠오르는지 두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역시 믿고 보는 김혜수, 유아인
영화 '타짜', '도둑들' 등을 통해 대체불가 매력을 보여준 김혜수는 이번 영화에서 전문 용어로 가득한 방대한 양의 대사를 소화해내며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로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남자 후배가 일하러 나가는 여자 선배의 구두를 신겨주고 재킷을 입혀주는 것을 1990년대에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한시현이라는 캐릭터는 그만큼 카리스마 있고 능력 있는 인물, 존경받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를 김혜수는 이질감 없이 표현해 낸다.
사실 유아인이 연기한 윤정학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동떨어진 인물이다.
국가의 위기를 기뻐하며 보는 이들을 허탈하게 하는 윤정학. 하지만 어째서인지 몰입도 높은 연기력으로 극에 조화롭게 스며든다.
1997년으로 돌아간 듯한 섬세한 연출
'국가부도의 날'은 20년 전 과거를 다루고 있음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제작진은 배우 의상부터 컴퓨터, 자동차, 휴대폰, TV 등 그 시대와 딱 맞는 소품을 구비 몰입도를 높였다. 심지어 영화 상영 중간 실제 당시의 뉴스 화면이 나와 '이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닌 진짜인가'라는 착각을 들 정도.
시민들이 걸어 다니는 온 길거리에 내걸린 '경축, 한국 OECE(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이라는 현수막 역시 그 때와 똑같다.
이는 역설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당시 시민들의 모습과 대조돼 더 큰 울림을 선사한다.
현실적인 엔딩, '정신 자위' 안해서 더 좋다
'국가 부도의 날'은 무능한 정부와 부정부패로 찌든 기업들, IMF 뒤에 서서 잇속을 챙긴 미국 등 그 당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에 선과 악의 대결이 뚜렷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뻔하게 권선징악 결말을 밟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결말을 그려낸다.
사실 IFM 사태가 21년이 지난 지금, 과거 옳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번 이들은 아무도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떵떵 거리며 잘 사는 재벌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는 이를 솔직히 드러낸다.
그리고 과거 IMF에서 큰 실패를 경험한 이들도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으로 묘사했다.
특히 갑수의 성격 변화가 매우 현실적이라 끝까지 기억에 남는다. 과거 바보같이 착하기만 했던 갑수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독해졌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한 명대사의 향현
"내가 속을 줄 알아? 절대 안 속아"
"끊임 없이 의심하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항상 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국가에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졌다. 물론 일부는 통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는 분명 패배의 역사다.
지금이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시대, 언론 통제가 빈번한 시대가 아니라고 그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현재 상황을 날카롭게 직관하고 묵묵히 자신의 걸어야 한다는 영화 속 김혜수와 유아인의 대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부도의 날'보면 아이라인 다 지워질 정도로 울게 되는 데 꼭 봐야 하는 이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신채호 선생
21년 전에 벌어진 IMF 사태. 그 후유증에서 진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가.
대량 해고가 가능한 현재의 시스템과 실업률 급증, 해외 투기자본이 쉽게 들어오는 구조, 경제적 양극화는 사실 IMF 이후 초래된 후폭풍이다.
'국가부도의 날'은 이를 친절히 설명하며,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많은 국민이 피눈물을 흘린 암울한 스토리라 달갑지 않더라도 '국가부도의 날'을 꼭 봐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가족, 친구 연인 그 누구와 봐도 대화할 거리가 많은 웰메이드 영화다. 상상치도 못한 깜짝 게스트가 기다리고 있으며, 오는 28일에 개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