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 마다하고 '화약 외길인생' 택한 김종희 한화 창업주
[인사이트] 이하린 기자 =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오나?"
1952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를 다시 일으켜 살리기 위해 공장 한편에서 화약을 제조한 청년이 있다. 바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아버지이자 한화의 창업주 故 현암 김종희 선대회장이다.
6.25 전쟁 이후 전국이 생필품 부족에 허덕인 시기였기에 기업인 중에서는 설탕, 비료, 약품 등을 해외에서 들여와 떼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김 회장에게도 생필품 수입 사업을 하라고 부추기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는 '화약 외길 인생'을 고집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나라의 기간 산업을 다지는 데 무엇보다 '화약'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선화약공판'에서 일하며 화약의 중요성 절실히 깨달아
김 선대회장이 화약과 연을 맺은 것은 경기도립상업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다.
당시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화약공판'에서 일하면서 화약이 산업용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김 선대회장은 한국전쟁이 터졌을 당시 화약고에 비축된 다이너마이트 3천 상자를 지키기 위해 피란을 가지 않았을 정도로 화약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김 선대회장의 뚝심과 열정이 만들어낸 다이너마이트
화약에 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그는 1952년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해 현 한화의 전신인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다 쓰러져가던 인천화약공장을 보수해 본격적인 화약사업을 개시했다. 화약 '수입'에 의존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체적으로 화약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의 숱한 시행착오 끝에 김 선대회장은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 1959년 1월부터 국산 다이너마이트 생산 및 판매를 시작했다.
'한국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킴'이라는 별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업보국' 이념 아래 강행한 한화의 사업 다각화
김 선대회장의 뚝심으로 탄생한 다이너마이트는 한국의 격동기였던 1960~70년 고속도로, 부두, 광산 공사 등에 사용되면서 국토 재건과 산업 기반 조성에 크게 일조했다.
이 시기 동안 지금의 한화는 석유화학, 금융업, 증권업, 건설 등 다방면에서 사업을 확장하면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김 선대회장은 1964년 국가 경제 최대의 현안이었던 기계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자,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신한베어링을 인수했다.
그가 화약 산업과 무관한 신한베어링을 품은 배경에는 '나라의 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의 창업 이념이 있었다.
기계공업 사업이 한국 경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적자를 감수하고 인수를 강행한 것이다.
1965년 석유화학산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에는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했으며, 1969년에는 국내 최초로 민간화력 발전소와 대규모 정유공장인 경인에너지를 건설했다.
영세한 낙농가 지원을 통해 농촌 재건과 국민 건강에 기여하고자 부도 직전에 몰린 대일유업을 인수해 정상화하기도 했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준비가 된 기업인이었다.
'정직과 책임'으로 극복한 시련
예상치 못한 시련도 있었다. 회사가 성장을 거듭하던 1977년, 화약을 싣고 가던 기차가 폭발한 '이리역 폭발사고'로 1,400명의 사상자와 약 61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 것.
김 선대회장은 사고 다음 날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피해 복구에 수많은 직원을 투입했다. 자신의 재산 90억원을 피해 보상금으로 내놨다.
그의 경영 철학인 '정직과 책임'으로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한국 화약과 김 선대회장에 쏟아졌던 비판 여론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국내 10대 기업, 글로벌 500대 기업으로 성장한 한화
'사업보국', 그리고 '정직과 책임'을 바탕으로 지금의 한화를 만들어낸 김종희 선대회장.
지난 9일 창립 66주년을 맞은 한화는 오늘날 국내 10대 기업이자 FORTUNE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으로 훌쩍 성장했다.
그리고 김 선대회장의 피, 땀, 눈물이 고스란히 들어간 인천의 작은 공장은 이제 한화의 도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한화 기념관'이 됐다.
평생을 한국의 기간 산업에 투신한 그의 창업정신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화의 '불꽃 정신'으로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