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다이아몬드 커팅 방식의 시계는 과거 고가의 명품 브랜드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이었다.
누구도 시도할 생각조차 못하던 시절, 크리스탈로 커팅 글래스를 만들어 합리적인 가격에 수출한 로만손 김기문 회장의 도전스토리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국의 시계 산업이 스위스나 일본 회사들의 하청 공장에 불과하던 시절, 고급화된 자체 브랜드를 선보여서 국산 시계를 전 세계에 수출하겠다던 김기문 회장의 다짐이 실현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8년.
과감한 승부사 기질이 성공에 이른 시간을 단축하는 열쇠가 되었다.
◆ 혁신적인 공법으로 크리스탈에 '커팅 글래스' 입힌 로만손 시계, 패션 중심지 美 뉴욕서 대히트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해외여행 자율화, 수입 개방화 조치 등이 시행됨에 따라 소비자들이 해외 브랜드 구매에 적극적이게 되면서 김기문 회장의 선제적인 자체 브랜드 출시도 빛을 발했다.
김기문 회장은 세계 시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30kg가 넘는 시계 샘플 가방을 들고 한달의 절반을 비행기나 허름한 해외 호텔에 머물렀다.
쉽지 않은 생활에서도 김 회장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제품이 좋으면 구매자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
특히 1989년 평면의 시계에 다이아몬드 커팅 기법으로 빛에 의해 입체적인 반사각이 도드라져 보이는 '커팅 글래스' 제품 출시는 김기문 회장이 이끈 로만손 시계의 성공 신호탄이 되었다.
'커팅 글래스'는 그동안 스위스의 최고급 시계 브랜드에서나 적용됐던 기법이다. 빛이 보이는 각도에 따라 반짝이는 효과가 뛰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 세계 여성 소비자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국내 최초로 합리적인 가격에 품질 좋은 커팅 글래스 시계를 출시한 로만손은 미국 뉴욕에서 대히트를 거두었다
패션의 중심으로 떠오른 뉴욕을 시작으로 파나마 등 중남미에서도 성공을 거둔 로만손 시계는 두바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터키 등 중동과 아프리카, 러시아 진출을 본격화하며 밀려드는 주문에 몸살을 앓았다는 후문이다.
◆ 로만손 시계 납품 요구하던 예멘 바이어, 김기문 회장에 "시계 공급해달라" 억류해
알려지지 않은 대한민국 중소 시계업체 로만손이 선보인 커팅 글래스 제품은 단숨에 해외 바이어들을 사로잡았다.
신뢰가 쌓이지 않은 기업간 거래에서 결제부터 한 뒤 주문하는 바이어들의 요청이 이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김기문 회장은 제품을 얻으려는 예멘의 한 바이어로부터 제품 납품을 강요당하며 억류되는 일까지 겪었다.
당시 김기문 회장은 두바이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중 호텔에서 자신을 내내 기다린 예멘 바이어들의 공항 배웅을 겸한 드라이브를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들은 김기문 회장을 붙잡아 억류했다. 1개국 1대리점 원칙을 고수하던 김기문 회장에게 물건을 공급받지 못한 바이어가 벌인 일이었다.
김기문 회장을 납치한 예멘의 시계 수입업자는 "우리에게도 로만손 시계를 내어달라. 물건을 줄 때까지 당신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며 제품 납품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제품 공급을 약속한 후 어렵게 풀려난 김기문 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내 회사 제품을 이렇게까지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운 것보다 기분 좋은 뿌듯함이 생겼었다"며 "좋은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인정받는 것만큼 기업가에게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 "반 발자국 앞선 타이밍에 과감한 도전이 로만손을 성공으로 이끌었소"
창립 8년만인 1996년 1천만 달러 수출탑 수상의 성과를 이룬 김기문 회장의 성공 비결은 과감한 승부사 기질과 반 발자국 앞선 도전 정신일 것이다.
실제 김기문 회장이 과감한 도전에는 늘 남들보다 반 발자국 앞서는 타이밍이 존재했다. 남북 경제 협력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던 시기에 개성 공단 진출을 고민했던 김 회장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개성 공단 입주 기업으로의 도전을 결정했다.
허허벌판 황무지이던 개성 공단을 분양받아 공장을 건축하고, 인력을 채용했으며, 법규를 만들고 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을 거친 김 회장은 2005년 북한땅에서 처음으로 통일 시계라는 이름으로 생산에 성공했다.
김기문 회장의 과감한 추진력과 승부사 기질이 로만손 시계의 개성공단 시절을 안정적으로 견인하자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제1대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을 맡게 되었다.
한국 기업을 대표해 북한 측과의 협상을 담당한 김 회장은 15개로 출발한 개성공단 입주 기업을 123개로 늘렸고, 북한 근로자 5만4천여명에게 일터를 제공했다. 김기문 회장의 이 같은 노력은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10.4 남북선언을 마치고 평양에서 내려오는 길에 첫 방문한 개성공단에서 격려와 박수갈채로 인정받은 바 있다.
최근 김기문 회장은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는 소회에서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기업가에게 가장 중요한 타이밍은 남보다 한 발 앞서는 것이 아닌 반 발자국 앞서는 도전"이라고 밝혔다.
김회장은 “남보다 한 발 앞서는 것은 너무 선구자일 수 있고, 남들과 같은 속도라면 금새 뒤쳐질 수 있다”며 “시장과 함께 호흡하면서 반 발자국 앞서 도전한 것이 성공이라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