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수)

"드디어 밥먹을 시간이 생겼어요"…'휠소터'가 바꾼 택배기사의 하루 일과



인사이트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이제 밥 먹을 여유가 좀 생겼죠"


지난 9일 오전 10시,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CJ대한통운 양천 서브터미널에서 택배기사 10년 차 김종문씨는 바삐 손을 놀리며 아침부터 구슬땀을 흘렸다.


자신의 앞으로 척척 도착하는 물량을 받아 검은 매직펜으로 주소를 체크해나갔다. 택배를 자동으로 분류해주는 휠소터가 들어서면서 김씨의 일과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아침 7시부터 출근해 눈이 빠지도록 운송장을 확인하고 직접 자신이 배달할 지역의 물량을 빼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계가 알아서 택배 트럭 앞에 물건을 가져다주니 일은 줄고 수입은 늘었다. 하루 400개 정도를 배달한다는 김씨는 예전보다 100만원~150만원 정도 더 벌고 있다며 허허 웃어 보였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택배가 분류되는 동안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뜬다는 것인데, 이때 김씨는 분류작업을 도와주는 아내와 함께 식사를 챙겨 먹는다. 과거엔 택배시간에 쫓겨 쉬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사이트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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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말부터 CJ대한통운은 1700억원을 들여 택배 자동 분류장치 휠소터를 설치했다.


전국 터미널 178개 중 현재까지 145개에 설치를 완료한 상태다. 물량이 적어 효율을 나지 않는 지방의 소규모 터미널을 제외하면 대부분 휠소터가 도입됐다고 보면 된다.


그동안 분류 작업은 택배기사들에게 가장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작업이었다. 길게는 7시간까지 해야 하는 노동이었지만 임금은 따로 없었다.


택배기사는 건당 수수료를 받는 개인사업자이기에 '분류작업'은 그야말로 공짜 노동인 셈.


이러한 택배기사의 불만과 업무 강도를 줄이려 CJ대한통운은 택배 업계에서 유일하게 휠소터를 계획했다. 


인사이트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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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들은 휠소터가 생긴 이후 확실히 노동강도가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일부 기사들은 3~5명씩 조를 짜 돌아가면서 오전 7시, 오전 9시, 오전 10시 30분에 출근한다. 택배가 분류돼 나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 3~5명분을 정리해도 충분하다.


나머지 기사들은 부족한 잠을 채우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느지막이 출근해 배송에 나선다.


한 택배기사는 "오늘도 오전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나왔다"며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라 말했다.


분류 작업에 손을 덜면서 일찍 완료된 물건을 먼저 실어 중간 배송에 나서는 택배기사들도 생겼다.


오후 2시에야 시작할 수 있었던 배송을 오전, 오후로 2번에 나눠하다보니 그만큼 퇴근 시간도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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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대한통운은 휠소터 도입이 택배기사의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 뿐 아니라 수익 창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CJ대한통운에 따르면 CJ소속 택배기사들은 평균 월 560만원을 벌어들인다.


차량 관리비, 유류세, 식비 등 제반 비용을 제외하면 순수입은 420만원 정도다. 연간 7천만원 이상의 고소득자 택배기사 비율은 전체의 약 23%를 차지하고 있다.


점점 업무 강도는 줄어들고 높은 집배송 밀집도로 수익이 높아지다 보니 타 택배업체에 비해 이직률도 낮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경쟁사의 이탈률은 평균 4% 수준이지만 CJ대한통운은 0.5% 이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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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시간도 없어 주먹밥을 입에 물고 배달해야 했던 택배기사들.


꼼짝없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붙어 있어야 했던 이들은 이제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커피도 한 잔 마신다.


소소한 일상일 수 있지만, 그동안 살인적인 업무 강도에 시달리고 있는 택배기사들에겐 간절한 순간이기도 했다.


휠소터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는 택배 업계 전반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남긴다.


분류 작업에 손을 덜면서 택배기사들이 근무시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기 때문.


이러한 시스템이 확산되어야 전국 모든 택배기사들의 살인 노동을 멈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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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CJ대한통운은 휠소터 도입에 이어 또 다른 변화를 시도 중이다.


곤지암 메가허브터미널을 본격적으로 가동해 업무 시간 단축의 발목을 잡았던 간선차 시스템을 개선할 방침이다.


최우석 CJ대한통운 택배사업본부장은 "무엇보다 택배기사와의 상생이 가장 중요하다"며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택배기사의 업무 강도를 줄이고 수입을 늘리는 구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