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최민주 기자 =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조국의 독립에 몸바친 한 창업주의 애국정신은 기업의 명성 120년이 넘도록 지켜냈다.
'국민 소화제'로 불리는 동화약품의 부채표 '까스활명수' 한 병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민족의 애환이 깃든 역사가 담겨있다.
까스활명수는 1897년 '사람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활명수'라는 이름으로 첫 선을 보였다.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신약이자 양약인 활명수를 만든 이는 현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 창업자 민강 사장과 아버지 민병호 선생이다.
이들은 마땅한 소화제가 없어 급체로 죽어나가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접목해 약을 개발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2만원에 가까운 가격이었지만 급체와 위장질병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면서 '만병통치약'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민강 사장은 활명수를 만들어 파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던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조국의 독립에 앞장섰다.
국가의 경쟁력은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 민 사장은 소의학교와 서울약학교 설립에도 힘을 쏟았다.
독립운동에도 직접 가담했다. 활명수를 팔아 얻은 수익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대고, 자금 조달이 어려울 때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활명수를 보내 이를 팔아 돈을 마련하도록 했다.
또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독립투사로 활동했고 동화약방을 임시정부와 국내를 잇는 '서울연통부'의 비밀연락 거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민 사장의 독립운동 사실이 일제에게 발각됐고 1921년과 1924년 두 차례 체포되며 혹독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결국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1931년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창업주는 스러졌지만 이후 동화약방은 독립운동가이자 경영 전문가인 보당 윤창식 선생에게 인수되면서 위기를 넘겼고, '동화약품'으로 새롭게 태어나 지금까지 긴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 1997년에는 기존 활명수에 '탄산'을 더하면서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지켜냈다.
올해로 '활명수'는 출시 121주년을 맞이했다. 지난해 매출액을 기준으로 약 563억 8천만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약 '85억병', 줄을 세워 지구를 25바퀴 돌 수 있을 만큼 팔렸다.
살얼음판보다 더한 일제 치하에서 독립에 대한 굳건한 의지와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일생을 산 민강 사장의 뚝심이 둘도 없는 국민 소화제 활명수와 동화약품의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