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03일(목)

독립운동가 끔찍하게 고문하고도 제 명에 죽은 '친일 경찰' 노덕술

인사이트노덕술 / 나무위키


[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끔찍하게 고문했음에도 광복 후 처벌받기는 커녕 오히려 출세한 친일파가 있다.


지난 1899년 6월 1일, 울산의 한 집에서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을사오적 못지않은 악질 친일 매국 경찰 노덕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울산에서 자라며 울산 공립보통학교 2학년을 다니다 중퇴한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에서 일하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일본 홋카이도로 건너갔다.


인사이트나무위키


이후 귀국한 그는 1920년 경상남도에 있는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뒤 경찰부 보안과 소속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울산경찰서 사법계 근무 당시 순사부장이 됐고 1924년에는 경부보, 1943년에는 경시, 1944년에는 수송보안과장까지 승진했다.


그가 이처럼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나 학생들을 잡아 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등 일제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동래경찰서에 재직 중이던 1928년 6월 동래고등보통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동맹 휴학을 주도한 흑조회 관련자 김규직·유진흥 등을 체포해 고문했다.


인사이트친일행위를 했던 경찰의 수를 나타낸 자료 / 온라인 커뮤니티


4달 뒤에는 동래청년동맹 집행 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공표를 체포해 끔찍하게 고문했다.


이 외에도 1929년 8월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강연자들에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고문치사를 당한 사람도 있었고, 민중들 사이에서는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는 인식이 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던 그는 광복 이후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인사이트이승만 전 대통령 / 연합뉴스


놀랍게도 노덕술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반공 투사'라는 극찬을 받는다.


이는 그가 1946년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했던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그의 석방을 종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노덕술은 이후 군에 입대해 헌병 중령으로 영전했다.


인사이트헌병대 근무 시절 노덕술(왼쪽에서 두 번째) / 온라인 커뮤니티


그는 1950년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 대장을 거쳐 1954년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1955년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그러다 이승만의 눈 밖에 나 귀향한 노덕술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1965년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그는 앓던 지병이 악화돼 3년 후인 1968년 4월 자택에서 사망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열사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고도 천수를 누렸던 노덕술.


인사이트노덕술 사단의 막내였던 박처원 치안감 / 영화 '1987' 스틸컷


그의 악랄한 고문 기술은 당시 노덕술 사단의 막내였던 박처원에게 전수됐다. 그리고 그는 전두환 정권 당시 치안감으로 재직하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영화 '1987'에서 배우 김윤석이 연기했던 대공수사처 박처장이 바로 노덕술 사단의 막내였던 박처원인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국가와 국민에 해를 끼친 노덕술이 지옥에서나마 그 죗값을 치르고 있길 바란다.


국어 교과서에 단골로 작품 실리는 '친일 문학인' 6명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본 문학인 중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파도 있다.


현재까지도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친일 음악인' 5명대한민국 사람들이 여전히 즐겨 부른 노래에는 불행하게도 '친일 음악인'의 곡도 있다.


황기현 기자 kihyu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