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디즈니 하면 '미키마우스'를 빼놓을 수 없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공주'로 대변되는 여성 캐릭터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마음씨에 가녀린 몸매를 가진 주인공 '프린세스'는 여자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남자아이들에게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자리 잡았다.
백설 공주를 비롯해 인어 공주, 자스민 공주나 신데렐라, 엘사 등 드레스를 입는 부류가 손꼽히지만 디즈니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녀린 캐릭터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씩씩한 소녀 앨리스나 용감한 책벌레 벨, 자유로운 여인 에스메랄다에 영웅 뮬란이나 모험가 모아나 등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도 발견된다.
디즈니는 아직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1937년 미국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첫 번째 작품으로 시작했다.
6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선보인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시대가 흐르며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디즈니 애니매이션이 발상지인 '미국' 당대 여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을 살펴보며 변화하는 시대를 가늠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1. ~1950년 이전: 백설공주와 같은 '수동적인 여성' 주인공으로 시작
디즈니의 첫 작품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년)를 필두로 한 디즈니 초기 작품들은 피노키오(1940년)와 환타지아(1941년), 아기 코끼리 덤보(1941년) 등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보다는 설화와 민담을 스토리의 중심내용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림체로 지금까지 사랑받는 백설공주와 1950년 발표한 '신데렐라'는 그 시대 여성들을 표현하기에 부족함 없는 캐릭터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계급주의와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함께 싸웠던 남성들이 자유를 쟁취하자 정작 여성들에게는 오로지 보조적인 역할만을 요구했다.
여성들은 이 사실을 각성했고 남성들에 대항해 참정권과 사유재산권, 가부장제적 상황에서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상황에 대해 벗어나고자 애썼다.
위에 제시된 두 작품에는 남성들에게 구해지고 선택받는 것을 기대하는 수동적인 여성상이 표현되어 있다.
2. ~1960년: 앨리스로 대표되는 '자기 주장'이 있는 여성 캐릭터의 등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년), 피터팬(1953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1959년)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 디즈니는 앨리스를 제외하면 여전히 수동적인 여성상을 그린다.
당시 미국 여성들은 내면화된 가부장제를 깨닫게 하는 의식화 모임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다.
모임은 일반 가정에서 소수가 모여 소통과 대화를 이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모두의 생각을 듣는 것이 모임의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에 순서를 정해 참가한 여성들 전체에게 발언 기회가 돌아갔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를 모두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흑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페미니스트'들과 사회 체계를 바꾸지 않은 채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만을 원한 '개혁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의견 차이를 보였다.
3. ~1970년: 차별 평등화 정책으로 '여성간 계급 대립' 나타남
디즈니는 귀엽고 영리한 달마시안의 매력에 전 세계를 빠져들게 했던 '101마리 달마시안(1961년)'과 '정글북(1967년)'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흥행작은 선보이지 못한다.
'101마리 달마시안'에 나오는 부부는 영국 런던 중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부부 자체는 평등한 모습을 보인다.
대신 백인 가사 도우미가 등장해 부부가 키우는 개들의 보살핌을 도맡는다.
가부장제 사회는 1870년대에 흑인 남성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하고 50년 뒤인 1920년대에 백인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한다.
흑인 여성들은 1965년 알라바마주 셀마에서 투표권을 벌어진 유혈사태 '셀마 행진'이 벌어진 이후에나 허용된다.
4. ~1980년: 여성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여성 주인공이 사라짐'
여성들의 운동이 집약되어 큰 힘을 발휘했던 이 시기에 디즈니는 여성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을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 디즈니가 발표한 작품은 아리스토캣(1970년), 로빈 훗(1973년)과 곰돌이 푸(1977년), 생쥐 구조대(1977년) 등이다. 언급한 작품 어느 것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없다.
이 시기 여성들은 노동 환경과 임금 수준 개선을 위한 투쟁을 이어간다.
또한 1970년대 초 대학가에 여학생들과 여자 교수들을 중심으로 젠더 차별 철폐를 호소하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났고, 후반에 이르며 대학에 여성학이 정착하게 된다.
'여성학'은 주류 학문에 편입되는 것은 성공했으나 강사 대부분 학위 미달로 해고되는 사태로 번지며 의식화 모임을 이끌었던 급진적 활동가들의 힘이 약해졌다.
이후 페미니즘은 어렵고 전문적인 언어로 가득한 소수 특권계급을 위한 '상아탑' 학문이 되어갔다.
5. ~1990년: '적극적인 주인공' 인어 공주 에리얼 선보이며 호평 받는 디즈니
80년대 이전까지 이어오던 모습은 이후에도 계속됐으며 디즈니 만화의 침체기도 이어진다.
1989년도 4년여에 걸쳐 만들어진 대작 '인어 공주'가 만화영화에 노래를 결합한 디즈니의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 구성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벼랑 끝에 선 디즈니는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길고 긴 여성 캐릭터 휴식기에서 벗어난 디즈니는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밝히며 사랑을 쟁취하려 나서는 이전과는 다른 여성상을 보여주며 관객들의 호평을 받는다.
이 시기 미국 여성들은 반목을 거듭한다. 1980년대 초 운동 초기에 중요시했던 정치화된 '자매애'가 희미해지며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여성이라면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이 페미니즘 정치를 약화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여성들과 달리 페미니즘을 자신의 경력을 쌓거나 계급상승을 위한 도구로 삼는 기회주의자들이 많았다.
여성들 사이에 계급을 나누고,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에 관심을 두기보다 겉보기만 신경 쓰는 여성들이 늘었다.
페미니즘 운동을 모든 유색인종 여성과 노동자 이하 계급 백인 여성들에게서 강탈하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것이라 주장한 ‘백인 여성’들과 대립이 이어진다.
'인어 공주'는 다른 여성들을 소외시킨 그들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6. ~2000년: 다양한 인종의 진취적인 여성 주인공을 앞세워 '르네상스'를 맞이한 디즈니
'확 달라졌다'는 말과 함께 소위 디즈니에 르네상스가 찾아왔다.
코디와 생쥐 구조대(1990년), 알라딘(1992년), 미녀와 야수(1994년), 라이온 킹(1994년), 포카혼타스(1995년), 노틀담의 꼽추(1996년), 헤라클레스(1997년), 뮬란(1998년), 타잔(1999년), 환타지아2000(1999년).
90년에 발표한 한 작품을 제외하고 디즈니는 내는 작품마다 그야말로 빵빵 터트리며 대중과 평론가를 모두 만족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알라딘과 포카혼타스, 노틀담의 꼽추, 뮬란에서 유색인종 여성 주인공이 등장했으며 모두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캐릭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2년 이후 빌 클린턴 체제에 있었던 미국은 그의 집권 기간 최장기 호황과 민주적인 나라라는 긍정적 평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97년 백악관 인턴사원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과 이후 사건에 대한 위증으로 미국 국민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7. ~2017년: 다시, '동물과 남성 주인공'에 중심을 두는 디즈니
밀레니엄을 맞이한 디즈니는 여성 캐릭터를 줄이고 동물과 남성 캐릭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릴로&스티치(2002년), 공주와 개구리(2009년), 라푼젤(2010년), 곰돌이 푸(2011년), 주먹왕 랄프(2012년), 겨울왕국(2013년), 빅 히어로(2014년), 주토피아(2016년), 모아나(2016) 등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조지 W. 부시의 집권기인 2000년부터 2008년까지 급격히 줄었던 여성, 유색인종 캐릭터들이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화이트 하우스에 들어간 2009년부터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한편 동화를 재해석해 적극적인 캐릭터를 보여 준 ‘라푼젤’과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라는 자매를 통해 남성 인물을 조연으로 삼고 여성 주인공 두 명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시도로 호평을 받았다.
'모아나'에서는 색다른 여성 영웅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관심을 끌었다.
디즈니는 순종적이고 남성의 보호와 선택을 기다리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에서 강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여성 캐릭터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앞의 예는 미국 당대 사회를 빗대고 있지만 한국 사회 또한 점점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변해가고 있다.
과연 디즈니는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지속해서 늘려나갈 수 있을까?
디즈니 작품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휘청휘청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가 다시 자본주의,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로 변모하면 디즈니의 필모그래피는 또다시 수동적인 여성들을 그릴게 될지 모른다.
이하영 기자 hayoung@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