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첫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첫 장면에서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밝혀준다는 것이다.
마치 두괄식으로 쓰인 논설문처럼 첫 장면의 잔상이 마지막까지 남아 영화의 이미지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이럴 경우 우리는 앤딩보다 첫 장면에서 받았던 인상에 대해 더 많은 말을 나누곤 한다.
그 힘들다는 좋은 첫인상 주기에 성공한 앤딩보다 첫 장면이 더 인상 깊은 영화 5편을 모아봤다.
1. 부산행(2016년 작)
부산으로 가는 KTX 406 열차에 이상한 여자가 한 명 뛰어들어온다.
한쪽 다리에 사람 이에 물린 자국이 선명하다. 종아리에서 시작된 붉은 실핏줄은 허벅지로 이어진다.
눈 또한 백내장에 걸린 것처럼 흰색 막이 씌워진 채로 좌우로 흔들거리며 앞으로 간다.
쓰러진 그를 도우려 다가온 승무원에게 본능적으로 올라타 물어버리자 승무원 또한 같은 증상을 보이며 다른 사람에게 달려든다.
그야말로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좀비 떼들 앞에서 관객은 좀비가 내 앞으로 달려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연상호 감독은 '인간 좀비'를 등장시키며 관객들을 긴장시키고 앞으로 영화의 흐름을 충분히 알려주는 데 성공했다.
2. 바스티유 데이(Bastille Day, 2016년 작)
군중이 운집한 파리 거리를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미모의 '나체' 여성이 지나간다.
여성이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은 사이 젊은 남성 한 사람이 군중 사이를 해치며 소매치기를 한다.
그가 소매치기한 것 중 하나가 '폭탄'이 든 가방이었다.
군중과 폭탄으로 '바스티유 데이(Bastille Day)'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7월 14일을 앞두고 터진 폭탄 사건을 처리하는 CIA 요원과 테러범들의 대결을 암시한다.
한편 15세 관람가로 설정된 영화 등급에서 첫 장면부터 나체의 여성이 등장해 등급 논란이 일기도 했다.
3. 위플래쉬(Whiplash, 2014년 작)
드럼을 치는 학생 앞에 헤어스타일부터 범상치 않은 민머리 교사가 말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그러나 그는 곧 돌변한다. 물건을 던지고 "빨랐을까 느렸을까" 위협적으로 묻는다.
자신의 밴드에 깽판을 놓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그는 눈물을 흘리는 학생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동정표라도 얻겠다고?"
이어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인신공격이 이어지고 눈물을 흘리던 학생은 조용히 눈물을 닦는다.
학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독종 교사와 좌절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생.
첫 장면에서 마지막을 말한다는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라고 외치는 독설 교사의 진심이 흘러넘친다.
4. 그래비티(Gravity, 2013년 작)
조용한 우주. 흥겨운 팝송이 들리는 가운데 우주에서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는 우주인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무 일도 없이 끝날 것 같던 이들의 지루해질 때쯤 러시아 인공위성의 파편이 우주왕복선을 연쇄적으로 파괴하며 급변한다.
처음 우주에 나와 신기하다며 내내 웃고 떠들던 사람은 얼굴에 파편을 맞고 순식간에 말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라이언과 맷은 그때부터 지구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천천히 우주정거장(ISS)으로 향한다.
12분간의 롱 테이크(Long take, 커트 되지 않은 단 한 번의 촬영이 평균적인 화면의 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경우를 일컫는다) 기법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엠마누엘 루베즈키(Emmanuel Lubezki)'에게 촬영상을 안기기도 했다.
5. 괴물(2006년 작)
2000년 2월 9일 주한 미 8군 용산기지 내 영안실. 청록색 수술복을 입은 사람 두 명과 나란히 놓인 갈색 병들이 보인다.
입에 걸쳤던 마스크를 벗고 한 백인 남성이 말한다. "그러니까 한강에 버리자고요"
하수구로 쏟아지는 연기를 뿜는 용액은 소독제, 살균제, 방부제로 쓰이는 국제암연구기관(IARC) 지정 1급 발암물질 '포름알데히드(formaldehyde)'다.
방독면을 쓴 남자는 탁자 위에 촘촘히 쌓인 갈색 병을 집어 들어 하수구에 붓는다.
한강으로 바뀐 장면은 낚시하는 남자들 앞에서는 어른 손바닥 안에 들어올 크기였던 '괴물'이 자살하는 남자가 다리 위에서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원인에 의한 결과. 봉준호 감독은 용산기지에서 한강에 방출한 독극물 뒤에 괴물의 발견을 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과관계를 연결한다.
이하영 기자 hayoung@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