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정은혜 기자 = 영화 '부산행'이 올해 첫 '천만' 영화가 됐다. 그만큼 오락영화로서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부산행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부산'이라는 생존의 마지막 희망이 남은 도시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는 동안 KTX 열차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모습은 마치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본 것은 아주 평범하고도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악행이다. 그것도 각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늘 행해지는 그런 악.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저 민폐 아저씨' 때문에 탄식하고 분노하지만 실제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쟁 시스템 속에서 자란 우리는 대개 용석(김의성 분)처럼 생각하고, 용석처럼 행동할 것을 학습하기 떄문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노숙자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우고 노력을 통해 얻은 자리에 큰 자부심을 가지며 자신 만큼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용석처럼 노골적으로 이런 점을 드러내진 않더라도 용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셈이다.
'부산행'을 본 뒤 기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영국의 영문학자 C.S 루이스가 말한 다음의 문구였다.
"오늘날 가장 큰 악은 디킨스가 즐겨 묘사하던 추악한 '죄악의 소굴'에서 행해지지 않는다. 강제수용소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실행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악의 최종적 결과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악을 구상하고 지시하는 일은 (그것은 기안, 검토, 결재, 기록의 절차를 밟는다) 카페트가 깔린 깨끗하고 따뜻하며 환한 사무실 내부에서, 흰색 와이셔츠에 잘 정리된 손톱과 매끈히 면도한 얼굴로 좀처럼 목소리를 높일 필요 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무 직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실 부산행의 최고 '민폐남'은 용석이 아닌 석우(공유)다.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며 최선을 다해 일하는 평범하고 능력있는 아빠지만, 대한민국에 '좀비 바이러스'라는 재난을 불러온 것은 석우가 따뜻한 사무실에서 내린 결정 때문이었다.
실제 대기업과 금융자본 종사자들이 '죽을 힘'을 다해 한 노동의 결과, 우리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 '이너 서클(Inner circle)'에 들어가기 위한 끊임없는 경쟁, 그리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사회의 최대 희생자는 '젊은 세대'다. 연상호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교 야구부 학생들을 통해 세대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감독에 따르면 부산행 KTX에 탔다가 '전멸'한 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은 세대 문제를 시사한다.
서로를 물어뜯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는 제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희생당한다는 점을 말이다.
모두가 정규직 또는 성공적인 삶이라는 열차에 타려 하고, 그 열차 안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안전한 도시, 궁극적 '구원'을 추구한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10억의 자산일수도 있고 1조의 자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산행 열차도 안전하지 않다. 부산행 열차가 안전해지는 길은 모두가 지금껏 배워온 생존 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일 뿐이라는 점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악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유태인 학살 과정에 일조한 예루살렘의 독일인 '아이히만'은 가족 사진을 품에 넣고 다녔고, 지각 한 번 하는 일 없는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평범함은 시스템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서 큰 악을 낳는데 기여했다.
아이히만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누구도 쉽게 단정할 수 없지만 아이히만이 모인 사회는 유태인을 집단 학살하는 괴물로 변할 수 있다.
영화 초반부의 석우, 끝까지 이기심을 보여준 용석, 그리고 타인을 도와주지 않고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아이히만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석우의 딸과 정유미, 그리고 정유미의 배 속에 있는 아기가 그것이다.
"이거 내가 만들었어"라는 대사로 웃음을 준 마동석과 정유미 그리고 석우의 딸만이 '남을 도와주지 말고 자기 앞가림만 하라'는 사회의 가르침을 거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마동석은 죽지만 정유미와 정유미의 배 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석우의 딸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은 것은 우리 사회의 마지막 희망이 이런 사람들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부산행'이 평론가와 관객 모두에게 후한 점수를 받은 이유는 이처럼 현실을 꼬집는 유의미한 메시지를 좀비 영화라는 새 장르 속에 완벽히 결합시킨 덕분이다.
정은혜 기자 eunhy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