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정은혜 기자 = 과거 '박연차 게이트' 당시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잡범'이라 말했다.
김대중 고문은 지난 2009년 4월 27일 조선일보에 '노무현씨를 버리자'라는 칼럼 기고해 "노무현 게이트에 얽힌 돈의 성격과 액수를 보면 그야말로 잡범 수준"이라며 "그래서 더 창피하다. 2~3류 기업에서 얻어쓰고 세금에서 훔쳐간 것이 더 부끄럽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먹고 탈이 날 수 있는 돈'과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돈'을 분류한다고 한다.
끝발이 약한 2~3류 기업에게 지원을 받다 소위 '끈'이 떨어지면 검사 몇 명이 달려들어도 바로 죄가 탈탈 털린다. 처벌까지 가는 길목에서 막을 윗선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돈은 무엇일까. 상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그 중에서도 '초일류' 기업의 돈이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해당 기업의 소위 '장학생'들이 깔려 있어 기업 비리가 잘 드러나거나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대기업이 움직인 수백억 대의 정치 자금은 일부 검사가 의기투합해 달려들어도 캐면 캘수록 나오는 '너무 거대한 몸통'이 부담스러워 수사가 중단된다고 한다.
아무튼 김대중 고문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잡범'이라며 '돈의 성격과 액수가 창피하다'고 한 것은 거물 정치인이어야 하는 대통령의 '격'에 맞지 않는 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요즘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됐고, 최순실 씨는 삼성에게 수백억대의 돈을 지원받은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과연 '거물급' 정치인에 어울리는(?) 규모다. 다만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았어야 할 돈'이 최순실 일가의 파렴치한 전횡과 상식을 초월하는 대통령의 황당한 국정운영 방식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과거 '노무현 게이트', '박연차 게이트'로 불렸던 사건을 대입해 도식화하면 이 사건은 '박근혜 게이트', 또는 '삼성 게이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비리에서의 핵심은 최순실 씨가 아닌 박근혜 대통령과 삼성이라는 사실이다.
대통령과 기업 사이에서 이득을 취한 '비선 실세'들은 규모와 성격만 달랐을 뿐 늘 존재해 왔으며 권력형 비리 사건에서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은 기업이 권력자(대통령 또는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게 대가성 있는 뇌물을 제공했는지 여부와, 그로 인해 권력자가 국가의 시스템, 공권력과 법을 움직여 '무엇을 했느냐'에 있다.
삼성은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지원을 한 뒤 이번 정권 아래서 모종의 특혜를 받지 않았느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특히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삼성이 추진하는 의료 서비스 산업 등 각종 숙원사업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 이재용 부회장 체제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은 이 부회장에게 결정적인 힘을 실어줬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 결정으로 국민연금은 막대한 투자손실을 입었고, 두 달 뒤 삼성은 정유라 씨에게 거액의 자금을 송금했다"며 "대가성이 없다고 할 수 있겠나"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또 박근혜 정권은 지난 정권에 이어 의료민영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발에도 2014년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에서 관철시킨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저성과자 해고도 삼성을 포함한 대기업들의 숙원 사항이란 점에서 못내 미덥지 않다.
이런 정황 탓에 이번 사건의 수사 방향도 처음에는 최순실 씨, 고영태 씨에서 시작했지만 '문고리 3인방'을 거친 뒤 대통령과 삼성그룹을 겨냥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 8일 새벽 삼성그룹의 심장부를 압수수색했으며 다음 주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수사할 계획이다.
다만 핵심적인 혐의 입증이 얼마나 이뤄질지 여부와 삼성그룹의 수장인 이재용 부회장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칠지 여부는 아직까지 미지수로 남아 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자는 이번 검찰의 조사와 사법부의 처리에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고 본다.
단순히 혐의가 있는 사건 연루자들을 단죄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낯으로 드러난 권력과 재벌의 심각한 유착을 이번 기회에 끊지 못하면 몇 년 뒤 똑같은 상황은 되풀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그룹은 지난 2008년에도 권력과의 유착 문제로 도입된 '삼성 특검'에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삼성은 권력이 바뀌자마자 또다시 같은 혐의에 휘말렸고, 지난 7년 간 아무탈 없이 높은 매출과, 그럼에도 다른 기업보다 낮은 법인세를 내며 몸집을 키웠다.
이번 일이 '핵심 몸통'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적당히 지나가고 나면 삼성은 몇 년 뒤 주인공만 달라진 채 똑같은 종류의 게이트 뉴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지 모른다.
삼성그룹이 최순실 일가에 막대한 현금을 지원한 사실에 대해 이재용 부회장이 전혀 몰랐다고 변명한다면 국민들이 과연 그 말을 믿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의혹이 있다면 삼성그룹의 사실상 수장이 된 이재용 부회장 역시 대통령과 함께 조사를 받고 모든 의혹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정은혜 기자 eunhy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