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5일(수)

실제 역사와 비교해봤습니다...이순신 장군 죽음 다룬 영화 '노량'의 진실 혹은 거짓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 5일 만인 크리스마스 당일 2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입소문을 타면서 빠른 속도로 관객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빠른 속도로 관객이 늘면서 '노량: 죽음의 바다'가 어디까지가 실제 역사고, 무엇이 허구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는 중이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의 진실 혹은 거짓을 살펴본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1. 노량해전에 거북선이 있었다?


영화에선 거북선 2척이 깜짝 출연한다. 일본군은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화포를 이용해 이 거북선을 침몰시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노량해전 당시 운용됐다는 기록은 없다. 거북선은 세 척 있었는데 모두 칠천량 해전에서 격침됐다.


명량해전 이후 노량해전까지 약 1년 이상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건조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현재 일본이나 조선의 기록에서 노량해전 당시 거북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또 일본군이 조선군의 화포를 노획해 사용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일본의 군함은 포격의 영향으로 배가 크게 흔들려 명중률이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2. 이규형이 연기한 아리마 하루노부가 노량해전에 죽었다?


영화 속 아리마 하루노부는 혀가 잘린 채 배 기둥에 묶여 있다가 처참하게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에선 죽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서 아리마 하루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해 서군 측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공격한다. 


영화에선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참하게 죽은 아리마 하루노부의 시체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1600년 11월 6일 사망한 고니시 유키나가보다 12년 뒤에 죽는다. 


또 아리마 하루노부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엄연한 다이묘 중 한 명으로 두 사람은 군신 관계가 아니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3. 이순신 장군 전사 이후 북을 친 사람이 첫째 아들 이회다?


이 부분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선조실록'에서는 손문욱 혹은 송희립이 이순신 장군 전사 후 대장선을 이끌었다고 기록했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조카 완이 지휘했다고 적혔다. 


류성룡은 다른 저술 '초본 난후잡록에서 이순신의 아들이 지휘했다고 밝혔으나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에서는 송희립으로 기록했고,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아들 회로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아들 회와 조카 완, 송희립 등이 이순신의 대장선에서 함께 전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영화에서 손문욱은 등장하지 않는다. 손문욱은 고향이나 생몰년이 미상이며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대마도 세력 측근으로 살다가 조선으로 귀순해 장수가 된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4. 고니시가 협공하기 위해 출전했다?


영화에서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후 이순신이 시마즈 함대와 전투를 벌이던 때 고니시 함대가 후방에서 협공을 하려다가 퇴각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고니시는 처음부터 협공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다른 사극과 달리 일본 측 수장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등장시킨 것은 정확한 고증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군 주장으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수장으로 나오는데 이는 오류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5. 준사가 백병전에서 생포 위기에 처한 진린을 구했다?


실제로 진린의 판옥선이 왜선들에 둘러싸이자 이순신 장군이 포격을 가해 왜선들을 격침시키고 구해냈다.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서 노량해전에 준사가 참여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준사는 조선에 귀순한 항왜로 안골포 해전 때 이순신에게 항복했다. 


난중일기 속 준사는 명량해전 당시 활약했다는 기록이 끝이다. 당시 준사는 숨진 왜장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순신 장군이 그 시체를 참수해 일본군의 사기를 꺾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투가 끝난 뒤 진린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순신을 찾아갔으나 이미 전사한 뒤였다는 건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진린은 "어른께서 나를 구해주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라며 통곡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