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임기수 기자 =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투구게는 매년 수 십만 마리가 제약회사 연구실에서 채혈을 당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투구게의 푸른색 혈액이 독소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에서도 수십만 마리가 희생됐다.
환경단체뿐 아니라 돈줄을 쥔 대형은행 그룹마저 해당 실험을 중단하라며 제약회사를 압박하고 나섰다. 투구게가 겪었던 '수난'이 끝날 조짐을 보인다.
지난 22일(현지 시간) 영국 매체 파이낸셜타임스(FT)의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은행그룹 BNP파리바 자산운용본부는 최근 세계 최대 제약회사 14곳에 서한을 보내 "의약품 실험에 투구게 혈액 대신, '재조합 C인자(rFC)'라는 대체 물질을 사용해 달라"고 촉구했다.
아담 캔저 BNP 미주부문 책임자는 "백신, 체내 의료장치 실험을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 한 종에 의존하고 있다"며 제약사들을 비판했다.
BNP파리바는 5,260억 유로(한화 약 765조 원)를 관리하는 유럽 최대 규모의 상업·투자 은행이다. 전 세계 기업 6만여 곳이 고객이다. 거대 투자자가 내는 '투구게 보호' 목소리를 제약업체들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FT는 전했다.
투구게는 공룡 출현 이전인 4억5,000만 년 전부터 모습이 바뀌지 않은 채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동물이다. 하지만 대표적인 실험동물로도 꼽힌다.
투구게 혈액 속의 '라이세이트'가 해로운 성분을 접하면 굳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들은 이를 활용해 세균 감염을 감지하는 '엔도톡신' 시험법을 써 왔다.
투구게 혈액 대체 물질인 rFC가 개발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약사들은 적극 도입하려 하지 않았다. rFC를 통한 테스트를 개발한 스위스 생명과학회사 '론자'는 FT에 "성분, 품질 등 미국 의약품 표준을 정하는 미국약전위원회(USP)가 (rFC 테스트를) 표준검사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USP는 "(새로운 대체 테스트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평가 자체를 반려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흐름이 바뀔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USP는 최근 "rFC 사용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겠다"는 성명을 냈다.
이에 더해 신약 개발의 돈줄을 쥔 대형은행까지 가세한 결과, 제약회사들도 이제는 투구게 혈액을 고집하기가 힘들게 됐다고 FT는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