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화)

조선인 6661명 희생시킨 '관동대학살' 인정 안 하는 일본 만행에 '꼬꼬무' 시청자 분노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


[인사이트] 이원선 기자 = 조선인 6661명을 희생시키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만행이 시청자의 분노를 자아냈다.


지난 1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독립운동가 박열 열사의 이야기와 관동대지진 학살이 조명됐다.


관동대학살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루머를 퍼트려 군경과 자경단이 손잡고 조선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살아있는 채로 한꺼번에 여럿을 묶어 수장시키고, 기름을 불어 불에 태워 죽이는 등 끔찍한 방법들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


이 사건에 기록으로 남은 희생자만 조선인 6,661명에 이르렀다.


당시 폭동 혐의를 뒤집어 씌울 대상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됐고, 그곳에는 박열과 박열과 함께 항일투쟁에 뛰어들어 폭탄테러를 계획했던 후미코도 있었다.


박열은 물증도 없이 체포됐으나 이 사건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으로 "황태자 한 마리를 해치우려고 했다"라고 거짓 역모를 인정했다.


후미코 역시 일본 왕세자 암살 누명을 썼지만 두 사람은 재판을 저항의 장으로 만들고자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사형 선고 이후 박열과 후미코는 서로 다른 형무소로 옮겨지고 서로 안부조차 전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4개월 뒤 후미코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형무소 독방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후미코의 죽음은 어딘가 석연찮았지만 진실 여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며 박열도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박열의 가족들은 박열이 북으로 납북됐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생사 여부도 알 길이 없게 됐다.


방송 말미에는 국적과 민족을 떠나 박열과 뜻을 함께했던 후미코와 다츠지의 이야기도 그려졌다. 후미코는 그의 바람대로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안치됐으며 다츠지는 "난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형제들에게 사죄한다"라며 끝까지 일본이 저지른 죄를 부끄러워했다.


자신들이 했던 과거가 있고 이를 부끄러워하는 일부 일본인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일본은 관동대지진 대학살을 인정하지도 사죄하지도 않고 있다.


이야기꾼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은 "일본에서 9월 1일은 방재의 날이다. 관동대지진이 9월 1일인데 우리는 다른 의미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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