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29일(일)

"오늘(26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범 총에 맞아 서거한 날입니다"

백범 김구 / 국가보훈처


[인사이트] 성동권 기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나의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71년 전 오늘인 1949년 6월 26일은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꾸던 '우리 민족의 큰 어른'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한 날이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양반들의 멸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현실에 실망을 느끼고 1893년 동학에 입도한다.


저항정신이 투철했던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받은 김구 선생은 탐관오리 척결과 척양척왜를 외치며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백범 김구와 그가 서거했던 경교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화 '대장 김창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불타오르던 당시, 1896년 2월 김구 선생은 치하포 주막에서 우연히 일본군 쓰치다를 마주친다.


쓰치다를 국모를 시해한 작당 중 한 명이라 생각한 김구 선생은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글을 남기고 쓰치다를 살해한다.


이로 인해 김구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선고받고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됐으나, 고종의 특사로 사형 직전 집행 정지령이 내려져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 칼 마이던스 / LIFE 1949년 7월호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김구 선생은 1898년 3월 탈옥한 후 이곳저곳을 떠돌다 기독교 신자 오순형을 만나 장연에 정착해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08년에는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 가입해 기부금 마련에 큰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1년 1월 일제에 의해 신민회가 검거되면서 김구 선생 역시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돼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이때 김구 선생은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을 따 호를 '백범'으로 바꿨다.


백범 김구 장례 행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김구 선생은 상해로 거처를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본격적인 항거에 나섰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일왕 저격과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를 지휘했다.


오직 조선의 힘으로 일본에서 독립하기 위해 애쓰던 김구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스스로 나라를 되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꼈다.


광복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친일파 숙청을 주장했으며, 남북 간의 '민족 통일'을 염원했다. 


그러나 남북 분단을 막지 못한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당시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안두희 생전 모습 / KBS1


이후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니 3개월 만에 15년형으로 감형되더니 2계급 특진과 함께 6.25 전쟁 때 포병 장교로 복귀한다.


제대 후에도 군납 공장 등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어들였던 안두희는 범행 43년 만에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으로부터 각종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4년 뒤, 안두희는 자택에서 박기서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다.


그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날은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숨을 거둔 지 47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