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박상우 기자 = 오늘(25일)은 6.25전쟁이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당시 북한은 한차례의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 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62만명의 사상자와 10만명이 넘는 전쟁고아·이산가족이 생겼다.
7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북한군이 서울대학교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의 피해도 아직 아물지 못했다.
북한군은 6·25전쟁을 일으킨 지 사흘 만에 서울까지 밀고 내려왔다.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에 대다수의 국민은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지만, 서울대병원에서 근무하던 의료진은 발을 뗄 수 없었다.
북한군의 공격에 몸을 다친 환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료진들과 그 가족들은 환자들과 함께 병원에 남았다.
의료진은 6월 28일 아침 서울을 점령하고 서울대병원까지 쳐들어온 북한군을 마주했다.
당시 병원에는 육군본부 소속 조용일 소령과 소대장이 지휘하는 국군 보병 1개 경비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치열하게 북한군에 맞서 싸웠지만, 전원 전사했다.
병원을 함락한 북한군은 저항할 수 없는 의료진과 환자, 가족들을 겹겹이 포위했다.
북한군은 병동을 돌며 침대와 바닥에 누운 환자들을 향해 총을 쐈고, 총을 맞고도 죽지 않은 환자는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나중에 들어서는 환자들을 병실 구석에 몰아넣고 한꺼번에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일부 환자들과 환자 가족들이 병원을 빠져나가 도망치기도 했으나, 보초를 서던 북한군에 걸려 대부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권총을 가지고 있던 환자들은 북한군에 응전하다가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6월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에 시체가 썩어 갔고, 북한군은 이들을 병원 앞길에 쌓은 뒤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웠다.
그날의 상처는 정확한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된 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사건에 대한 공식 명칭조차 제대로 없는 실정이다.
다만 서울대병원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1천여명으로 기록이 돼 있고 보훈처는 약 900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사건은 반 인류·반인도적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 1864년 체결된 제네바 제1 협약을 통해 각 전쟁국은 육전에서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을 우선시해야 한다.
적대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부상병, 포로, 조난자에 대해서는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들은 이를 어기고 무참히 학살을 이어갔다. 서울대학교에서 이뤄진 학살은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북한은 여전히 사과는커녕 호시탐탐 남한에 군사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900명의 일반인을 무참히 살해한 이 사건은 잊혀서는 안될 역사로 길이 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