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29일(일)

해인사 폭격 명령에도 목숨 걸고 '팔만대장경' 지킨 김영환 장군 유물 '국가 문화재' 된다

뉴스1


[인사이트] 민준기 기자 =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 혜래본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꼽을 것이다.


13세기 고려는 영토를 탐내던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부처의 힘을 빌리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진정 부처의 힘이라도 깃든 것일까. 팔만대장경은 수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소실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사실 이 팔만대장경의 보존은 숨겨진 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영웅은 한국전쟁 당시 공군 전투 비행대 소속이던 김영환 대령이다.


24일 문화재청은 김영환 장군의 명패 등 공군 제10전투비행단 관련 군사기록물을 포함한 6.25 전쟁기록물 3건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문화재청


합천군


한반도에 포탄이 빗발치던 지난 1951년.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복무하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낙오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다는 첩보를 듣고 상부에서 폭격을 지시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 장군 상부의 명령과 다르게 "내 명령 없이는 절대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상부의 폭탄 투하 명령이 반복해서 내려왔지만 그는 사찰 상공을 몇 번 선회한 뒤 해인사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폭탄을 투하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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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상황에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경우 최대 사형까지 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사찰이 국가보다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공비보다는 중요하다"며 명령 불복종의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미군을 비롯한 상부는 크게 분노했고 그를 곧바로 김 대령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사형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갔지만 그가 세운 전공과 동료들의 증언 덕에 처분을 피할 수 있었다.


김 장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종간을 놓치 않았다. 그는 전쟁이 끝난 1954년 3월 사천기지를 이륙해 강릉기지로 향하던 도중 기상악화로 인해 동해 상공에서 실종됐다. 그의 나이는 고작 34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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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입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설치돼있다.


만약 그가 해인사에 폭격을 했다면 8만 장의 목판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을 것이다.


이번에 등록예고된 김 장군의 명패는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했을 당시 사용했던 것이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인 해다. 잠시라도 좋다. 내일(25일) 김 장군을 비롯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