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전형주 기자 = 오직 짱돌만 갖고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 달려든 24살의 청년이 있었다. 들끓는 애국심만큼은 안중근 의사 못지않았던 독립운동가 원태우 지사다.
원 지사는 1905년 11월 22일 이토를 향해 의롭게 돌팔매질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꼬박 5일 만에 벌어진 의거였다. 안양시 등에 따르면 원 지사는 이토가 수원역에서 서울역행 열차에 탑승했다는 첩보를 듣고 이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를 준비하는 데까지는 여러 고비가 있었다. 당초에는 철로에 커다란 바위를 놓고 열차를 전복시킬 계획이었지만, 함께 거사를 준비한 이만여가 겁을 먹고 바위를 치워버렸다.
고민하던 원 지사는 결국 홀로 이토를 응징하기로 했다. 그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당시 시흥군 동면 안양리)에 설치된 철로 부근에서 이토가 탑승한 열차를 숨죽여 기다렸다.
멀리서 열차가 보이자 그는 집히는 대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열차가 가까이 올수록 그의 돌팔매질은 더욱더 거세졌다.
열차가 빨랐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러 악조건에도 그는 이토를 정확히 겨냥해 돌을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돌멩이는 이토를 향해 정확히 날아가 창문을 박살 냈다.
결국 이토는 깨진 창문의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파편은 얼굴을 비롯해 총 여덟 군데에 박혀 이토에게 큰 부상을 입힌 것으로 알려졌다.
원 지사는 도망치지 않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열차의 운행을 방해한 혐의로 징역 2개월에 태형 100대를 선고받아 이듬해 1월 24일 석방됐다.
그리고 그는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의 순간에도 살아있었다.
하지만 고문에 의한 각종 후유증과 일제의 감시로 평생을 불행하게 살다 1950년 생을 마감했다. 향년 69세의 나이였다.
이토를 처단하겠다는 그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의 발화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다. 실제로 이 의거가 끝나고 전국에서는 항일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안중근 의사보다 4년이나 빨리 이토에게 달려들었던 이 청년은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에 추서됐다. 안양시도 최근 만안도서관 등에 원 지사의 동상을 세워 원 지사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