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6·10 민주 항쟁 6주년이던 지난 1993년 6월 10일 저녁, 각 방송사의 헤드라인 뉴스는 끔찍한 군부대 포탄 폭발 사고로 장식됐다.
이날 오후 4시 5분쯤 경기 연천 육군 다락대 포사격 훈련장에서 동원 훈련 중이던 예비군 16명과 장병 3명이 포탄 폭발 사고로 숨지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사고 직후 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고 한다.
화약 냄새가 진동했고 폭탄 파편으로 잘려나간 청년들의 팔다리와 주인 잃은 군화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사상자와 생존자가 뒤섞인 가운데 혼란과 공포의 분위기가 이어졌다.
현장에서 숨진 예비군의 사연도 전해져 시민들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23세 청년 하모 씨는 숨지기 한달 전 김포의 한 가구공장에 취업했다. 처음으로 탄 월급 50만 원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맡겼다.
그런 효자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TV로 접한 아버지는 통곡하다가 실신했다.
하씨를 비롯해 젊은 청년 19명이 목숨을 잃은 이 사고로 예비군의 허점은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사고는 포탄의 신관을 조작하는 과정에서의 실수 또는 신관 불량 등에 의한 것으로 결론 났다. 피해를 키운 건 예비군 훈련장에서 이뤄진 군의 안일한 태도였다.
보통 1개 포병의 경우 8~9명으로 구성되나 당시 예비군들은 모두 23명이 편성되었다. 정해진 인원보다 많은 예비군이 편성돼 사고 당시 피해가 더 컸다.
또한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포사격 훈련이었음에도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예비군들은 포병이 아닌 보병 또는 다른 주특기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현장에 있던 조교 3명도 포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안전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명백한 '인재(人災)'였던 것이다.
국방부는 예비군 수, 훈련 시간, 동원 횟수 등 대대적인 예비군 운용 제도 재검토에 들어갔으나 사상자들의 슬픔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예비군들이 술을 먹었다', '포탄에 망치로 충격을 줬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퍼진 것이다.
더불어 교육 중에 이 사건을 이야기하며 예비군들에게 겁을 주는 부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고 원인을 희생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사실인 양 퍼졌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19명의 청년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고통받은 이유다.
한편 사고 이후 해당 포병부대는 해체됐으며 19명의 현역 장병 및 예비군은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