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회장,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실패
[인사이트] 이하린 기자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결국 실패했다.
이로써 조 회장은 지난 1999년 4월 아버지인 故 조중훈 회장에 이어 20년간 맡아오던 대한항공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조 회장의 불명예 퇴진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조 회장 일가의 갑질이 쌓이고 쌓여 결국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2015년 조 회장의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도미노처럼 이어진 한진 일가의 '물컵 갑질', '대학 부정 편입학', '폭행 및 폭언', '조세 포탈' 등 이슈가 결국 조 회장 연임 실패라는 최악의 상황을 몰고 왔다는 분석이다.
27일 주주총회…조 회장 연임안에 35.9%가 '반대'
27일 대한항공은 서울 공항동 본사에서 제57기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을 포함한 4개 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대한항공 지분은 조 회장과 한진칼(29.96%) 등 특수 관계인이 33.35%를 보유 중이고,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11.56% 지분율을 보유하고 있다. 이 외 외국인 주주 20.50%, 기관과 개인 소액주주 등 기타 주주 지분이 55.09%다.
이날 주총에서는 위임장 제출 등을 포함해 5,789명, 총 7,004만 946주가 의결권을 행사했다. 의결권이 있는 주식총수 9,484만 4,611주의 73.84%에 해당하는 수치다.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에 대해 64.1%가 찬성 표를 던졌고 35.9%가 반대 표를 던졌다. 정관상 의결 정족수인 3분의 2를 충족하지 못해 조 회장의 연임안은 부결됐다.
대한항공 2대 주주 국민연금,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 이력이 있다"
여기에는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반대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난 26일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수탁위)는 조 회장 연임과 관련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 이력이 있다'고 판단해 '연임 반대' 의결권을 정했다.
현재 조 회장은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와 대한항공 납품업체를 이용해 면세품과 중개 수수료 등을 취한 혐의로 기소되는 등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수탁위는 또한 지난 2015년부터 연쇄적으로 불거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 등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주가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이 같은 결정에 더해 해외 기관, 소액주주까지 등을 돌리면서 결국 조 회장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주총에서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한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 역시 주주 발언에서 "땅콩 회항부터 시작된 조 회장 일가의 전형적인 '황제 경영'으로 한진그룹과 대한항공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항공, "사내이사직 상실이지 경영권 박탈 아냐"
연임안이 부결된 후 대한항공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조양호 회장은 주총 결과 사내이사 재선임이 부결됐다. 이는 사내이사직 상실이며 경영권 박탈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여전히 조 회장이 대한항공 최대주주인 한진칼의 최대주주이고, 회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란 뜻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조 회장이 회사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됐으므로 사실상 경영권을 박탈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게 전반적인 시각이다.
결국 사상 최악의 오너리스크로 인한 경영권 약화가 현실화된 셈이다.
주주권 행사로 인해 재벌 총수가 경영권 잃은 첫 사례…덩달아 긴장하는 오너들
특히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실패는 최근 한층 강화된 주주권 행사에 따라 국내 재벌기업 총수가 경영권을 잃은 첫 사례로 기록돼 더욱 의미가 있다.
철옹성 같던 대기업 CEO 자리를 주주의 손으로 내친 최초의 사례인 만큼 향후 우리나라 기업 경영에서 주주 목소리가 더욱 커질 수 있는 신호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재계도 덩달아 긴장하는 모양새다. 국민연금이 지분 10% 이상을 소유한 대림산업, 포스코, GS건설, KT 등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게 됐다.
특히 국민연금은 오너 이해욱 회장의 '운전기사 갑질' 논란이 불거졌던 대림산업의 지분 13.2%를 소유한 2대 주주다. 업계에서는 대림산업이 대한항공에 이은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진정한 '용퇴' 꿈꾼다면 조 회장 사례 가슴에 새겨야
이제 굵직한 대기업 총수들은 '오너리스크' 방지를 위해 더욱더 각고의 노력을 다할 때다. 온갖 갑질을 일삼고도 '재벌'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유야무야 넘어가던 시절은 이제 없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주주들의 감시의 눈초리는 계속해서 매서워질 것이고, 말도 안 되는 갑질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오너는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불명예스럽게 내려놓아야만 할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년간 지켜온 대한항공 경영권을 맥없이 내려놓게 된 조 회장처럼 말이다.
주주 손에 떠밀리듯 물러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용퇴'를 꿈꾸는 오너라면 이날의 사례를 가슴 깊이 새기자.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오너만이 제2의 조 회장이 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