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가슴이 답답해지는 외침이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안중근 의사의 아들은 '친일파'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지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는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조선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는 순간이었다.
1910년 2월 14일, 불법 재판을 이어오던 일본 법정은 결국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한 달여 후인 3월 26일 졸속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당시 일본은 안 의사의 유해도 돌려주지 않은 채 임의로 매장해버렸다. 그가 유언대로 하얼빈 공원에 묻힐 경우 그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원하는 곳에 묻히지 못한 안중근 의사.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민족에겐 '영웅의 후손'이었지만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이자 경계 대상일 뿐이었다.
숱한 탄압에 풍비박산 난 안 의사의 가족은 일제의 끊임없는 협박과 감시를 견디다 못해 중국으로 거처를 옮겨간다.
그럼에도 장남 안우생(안분도)은 중국 만주에서 누군가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이 점령한 상하이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가던 안준생은 결국 1939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둘째 아들 이토 분키치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다"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분키치는 "나의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도 지금은 부처가 돼 하늘에 있기 때문에 사과의 말은 필요 없다"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웅의 아들이 추악한 변절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일제는 언론 등을 이용해 안준생의 사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분노한 백범 김구 선생은 안준생을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처단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중국의 애매한 태도로 인해 처단에 실패했고, 안준생은 미나미 지로 총독의 양아들이 돼 용돈을 받으며 살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영웅' 안중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친일'의 길을 선택한 안준생. 그는 광복 후 중국에서 살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들 앞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 따르면 안준생은 변절 뒤 쏟아진 비난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