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화)

'감동란' 맛에 감동해 망하던 일본 회사 국내로 들여온 한국인의 정체

감동란 / 감동란 홈페이지 


1972년부터 일본에서 사랑 받아온 '특별한 삶은 달걀' 


[인사이트] 이하린 기자 = "저는 20년간 물(水) 사업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남은 인생은 이 계란에 걸고 싶습니다. 저는 이 사업을 '목숨 걸고' 할 겁니다"


한국에서 날아온 낯선 남자의 이 말이 타카오카 타카히로 현 ㈜마루카네코리아 대표의 마음을 움직였다. 


타카오카 대표는 당시 일본의 식품제조기업 ㈜마루카네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마루카네는 껍질이 붙어 있는 달걀에 그 상태로 소금의 짠맛을 적절히 넣을 수 있도록 연구해 아주 특별한 삶은 달걀을 개발해냈다. 


그렇게 탄생한 삶은 달걀은 1972년부터 40여년간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이 달걀은 한국에서 '감동란'이라는 이름으로 불티나게 팔린다. 


㈜마루카네코리아의 이종섭 상무(왼쪽), 타카오카 타카히로 대표(가운데), 타무라 마사노리 이사(오른쪽) / 감동란 홈페이지 


일본에서 기울던 ㈜마루카네…이종섭 상무가 한국 사업 설득해 


2010년 여름, 한국에서 물 장사를 하던 이종섭 현 ㈜마루카네코리아 상무는 우연히 일본에서 ㈜마루카네의 삶은 달걀을 맛보고 푹 빠져버렸다. 


한국에도 이 감동적인 맛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상무는 그 길로 ㈜마루카네를 찾아가 타카오카 대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감동란 홈페이지 


설득 과정이 수월했던 건 아니다. 잘 나가던 ㈜마루카네였지만 당시 회사 사정으로 인해 공장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전성기 때만 하더라도 300명 이상의 직원이 일하던 공장은 폐쇄 절차를 밟았고, 타카오카 대표는 직원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자괴감에 빠졌다. 


심지어 타카오카 대표가 심기일전하고 일본에 제2공장을 세우려 했을 땐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을 덮쳤다. 새로운 공장 건설의 꿈이 물거품이 되자 이젠 정말 포기할까 싶었다. 


Instagram 'namu42n'


'감동란'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판매 시작 


그렇지만 이 상무는 끈질겼다. 다시 한 번 ㈜마루카네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에서 사업을 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마루카네 대표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그렇게 2012년 8월, 충남 논산 연무읍에 한일합작회사인 ㈜마루카네코리아가 설립됐다. 


특별한 삶은 달걀의 이름은 '감동란'으로 지었다. 이름을 전문으로 짓는 업체에서 '감동란'보다는 소비자에게 더 쉽게 각인될 이름으로 정하자고 말렸지만 이 상무는 완강했다. 


그가 일본에서 달걀을 먹고 감동했던 느낌 그대로, 이를 맛본 사람들은 모두 감동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Instagram 'flora.chaeyeon'


부드럽고 촉촉해 국내 소비자 마음 사로잡은 '감동란' 


한국에서 감동란이 '대박'을 낼 것이라던 이 상무의 혜안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2013년 국내 시판에 나선 감동란은 출시 이후 월평균 90만개가량이 팔릴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광고나 홍보를 따로 하지 않았음에도 공급량 부족에 허덕일 정도였다. 


퍽퍽한 삶은 달걀 맛에 익숙했던 국내 소비자에게 부드럽고 촉촉한 감동란은 그야말로 신세계로 느껴졌다. 


㈜마루카네코리아는 인기를 얻을 수록 더욱 엄격한 품질 관리를 통해 언제나 '감동적인' 맛을 유지하려 노력 중이며, 세척 및 선별에 있어 높은 레벨의 신선한 달걀을 엄선해 공급 받고 있다. 


GS25


2017년 편의점 냉장식품 판매 1위 기록


현재 감동란은 GS25, 세븐일레븐, 미니스톱 등 인기 편의점을 중심으로 활발히 판매되고 있다. 


다이어터에겐 든든한 한 끼 식량으로, 일반 소비자에겐 맛있는 간식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 


2017년에는 편의점 냉장식품 판매 1위를 달성하는 대기록을 내기도 했으며, 편의점뿐 아니라 백화점과 전국 대형마트, 각종 온라인몰에서도 꾸준히 높은 판매량을 기록 중이다. 


부드럽고 촉촉한 감동란으로 우리에게 신세계를 안겨 준 ㈜마루카네코리아. 


이 모든 것은 기울어가던 일본 기업 대표를 설득해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의지의 한국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