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우유'로 시작해 전국민이 마시는 '서울우유'로 성장81년간 국내 우유업계 선도해 온 서울우유의 고집과 저력
[인사이트] 심채윤 기자 =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먹어봤다는 작은 종이팩에 담긴 '서울우유'.
서울우유는 1937년 직접 목장을 운영하는 낙농업계 종사자 21명이 시작한 '경성우유동업조합(경성우유)'를 시초로 국민에게 가장 먼저 선보인 우유 브랜드다.
우유가 귀했던 그 옛날, 서울우유는 국민에게 신선한 우유를 공급하기 위해 낙농인들이 함께 모여 최초로 설립됐다.
당시는 일제강점기 시절. 전쟁으로 인해 유아와 어린이, 병약자들의 영양이 극도로 부족했던 상황이다. 이들을 위한 영양공급으로 우유가 꼭 필요했다.
찾는 사람은 많고 우유는 한정돼있다 보니 1944년 5월부터는 우유가 필요한 사람은 의사 진단서를 첨부해 경성부 총력과에 신청서를 내야 하는 '우유 등록제'가 실시될 정도였다.
서울우유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서울시로 바뀐 경성부 명칭에 따라 '서울우유동업조합'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서울우유' 판매에 나섰다.
하지만 자본을 대줄 수 있었던 일본이 물러난 데다가, 몇 년 동안 진행된 한국 전쟁 여파로 1950년의 낙농 기반은 무척이나 망가져 있었다.
설상가상 일본에서 전량 수입에서 쓰던 우유병은 전쟁 후 대부분 없어져 사용이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서울우유는 미군 부대에서 나와 시중에서 가장 구하기 쉬웠던 '맥주병'을 사용해 우유를 팔기도 했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서부터 서울우유는 보다 신선하고 좋은 우유를 제공하겠다는 마음으로 품질 향상에 더욱 힘썼다.
우유를 마시면 소화가 잘 안 되는 현상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1961년 유지방 소화를 돕고 지방이 뜨는 '부유현상'을 없애는 균질기를 도입했다.
그다음 해인 1962년에는 국내 최초로 선진화된 고급 균질 우유를 생산해 집집마다 배달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낙농 장려 지원 정책 덕에 서울우유 전용 '유리병 우유'를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972년부터는 당시 최신식 살균방법인 '초고온 순간 살균법'을 시행했다. 이는 우유 고유의 맛은 지키면서도 영양성분 손실을 최소화해 대중성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폴리에틸렌 재질의 삼각 포장인 '삼각 포리'도 이 시점에 등장했다.
1974년 '삼각 포리' 흰 우유를 유통하기 시작한 서울우유는 1979년에는 현재 대부분의 우유 패키지인 삼각 지붕 모양의 '카톤팩 우유'를 생산했다.
병 우유는 깨지기 쉬운 데다가 유통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1989년을 마지막으로 서울우유의 병 우유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1984년, 서울우유는 우유 품질 고급화 시대를 위해 한 발짝 더 나섰다. 생산부터 유통까지 전 과정이 냉장 상태로 이뤄지는 '콜드 체인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완비했다.
1997년부터는 흰 우유 전 제품에 1등급 우유를 사용, 지난 2005년 9월에는 한 단계 더 상승한 '1등급 A'라는 고품질 우유를 출시했다.
이처럼 끊임없는 혁신과 발전으로 서울우유는 한국 우유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탄탄한 기반을 세운 일등 공신으로 등극했다.
서울우유는 올해로 무려 81년간 우유 업계의 대표적인 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장수제품이 됐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우유 시장 점유율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더불어 서울우유에 따르면 하루 평균 서울우유 판매량은 지난 11월말 200mL들이 기준 827만개에 이른다.
꾸준히 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서울우유가 다가오는 2019년에 세울 기록들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