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부에 의해 산산조각 난 재계 7위 '국제그룹' 정권 눈 밖에 난 기업의 말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인사이트] 윤혜경 기자 = "자고 일어났더니 기업이 해체돼 있었십니더"
1985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던 재벌기업을 이끌던 고(故)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된 회사를 보고 한 말이다.
양정모 회장의 국제그룹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날 법한 회사가 아니었다.
연간 매출액 2조원, 수출액 9억 달러(한화 약 1조 35억원) 가량의 실적을 내는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이었다.
건실한 기업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그룹이 해체하게 된 뒷 배경에는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가 있었다.
신발 사업으로 대박 나 21개 계열사 거느렸던 국제그룹
재계와 업계에서는 정권의 눈 밖에 난 기업의 말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제그룹'이라고 말한다.
1985년 전두환 정부에 미운털이 박혀 해체되기 전만 해도 국제그룹은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잘 나가는'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 중 하나였다.
건설업, 제철업, 호텔사업 등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댄 국제그룹은 삽시간에 몸집을 불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사업은 바로 '신발사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그룹은 '고무신'으로 시작한 회사였기 때문이다. 국제그룹의 시초는 국제고무의 '왕자표 고무신'이다.
품질 하나로 '국민 고무신' 등극한 양정모 회장의 '왕자표 고무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양정모 회장은 1949년 선친이 부산 범일동에서 운영하던 정미소 한편을 빌려 고무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양 회장이 고무신을 생산하던 시기는 춘추전국시대와 다를 바 없었다. 범표 고무신, 말표 고무신, 기차표 고무신 등 다양한 브랜드가 고무신을 출시하며 경쟁을 펼쳤던 상황. 레드오션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 회장이 왕자표 고무신을 시장에 내놨다. 이미 포화상태와 다를 바 없는 고무신 시장이었지만, 양 회장의 왕자표 고무신은 삽시간에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다.
여타 브랜드의 제품과 달리 고무신의 '품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쉽게 찢어지고 추운 날에는 부러지기까지 하는 타사의 고무신과는 달리 튼튼하고 질긴 왕자표 고무신은 입소문을 타며 '국민 고무신' 반열에 올랐다.
국제고무→국제화학으로 사명 변경하며 '운동화' 사업 시작
양 회장의 국제고무는 왕자표 고무신으로 흥행가도를 달린다. 하지만 1960년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고 말았다.
공장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60여명의 여공이 목숨을 잃으면서 양 회장은 고무신 사업을 접게 된다.
순식간에 잘 나가던 고무신 회사의 문을 닫게 된 양 회장은 차기 사업을 구상한다. 그리고 운동화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양 회장은 일본에서 인조가죽을 이용한 신발 제조법을 배운 뒤 서독에서 최신식 기계를 가져와 본격적으로 운동화를 생산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운동화가 바로 '왕자표 운동화'다. 양 회장은 운동화로 사업분야를 변경하면서 사명도 국제고무에서 국제화학으로 바꾼다.
국제화학에서 운동화가 탄생했던 시대의 한국은 산업화로 국민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대중들은 고무신보다 조금 더 나은 품질의 제품을 원했다. 시대적 흐름 특성상 양 회장의 프로스펙스는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품질 앞세워 국내 최초로 미국에 '운동화' 수출한 국제화학
좋은 품질을 앞세운 왕자표 운동화는 날개 돋친 듯 판매됐고, 1962년 국내 최초로 미국으로 운동화를 수출하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한다.
'가성비'를 내세운 프로스펙스는 미국 현지에서도 품질을 인정받으며 엄청난 특수를 누린다.
덕분에 국제화학은 승승장구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1975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는 쾌거를 달성한다.
국제화학이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 '삼성', '대우', '쌍용'에 이어 네 번째로 종합무역상사가 된 것이다.
삼성·대우·쌍용 이어 네 번째로 '종합무역상사' 지정…국제상사 승승장구
종합상사로 지정받으면 막대한 금융 특혜를 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던 만큼 이때부터 국제상사는 본격적으로 덩치를 키운다.
그 덩치를 보여주는 예가 국제그룹의 사옥인 국제빌딩이다. 80년대 초,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63 빌딩과 함께 국제빌딩이 거론됐다고 한다. 국제그룹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사세를 확장한 양 회장은 1981년도 말 국산 고가 브랜드 운동화 '프로스펙스(PRO-SPECS)'를 출시한다. 국민 소득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국민들이 해외 명품 스포츠 브랜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을 빠르게 캐치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86 아시안게임·88 올림픽 유치 소식이 전해지면서 스포츠 산업분야에 특수가 예고됐던 때다.
다시 또 시기를 잘 탄 양 회장의 프로스펙스는 해외 브랜드 나이키, 아디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프로스펙스'로 또 대박친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망하게 된 배경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양 회장의 국제그룹은 1985년 2월 주 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으로부터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전해듣는다.
"국제그룹은 부실 그룹으로 판명됐기 때문에 그룹 전체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전두환 정부의 압박으로 재계 7위의 건실한 기업이 한순간에 부실기업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결국 국제그룹은 자사보다 한참 규모가 작은 한일합섬과 극동건설, 동국제강 등에 분할 합병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국제그룹 사라지고 전두환 정부에 '기부금' 상납 잘 한 재벌그룹들
전두환 정부에 의해 양 회장의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을 본 재벌그룹의 수장들은 전두환 정부에 평소보다 더 기부금을 납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양 회장이 전두환의 재단인 '일해재단'에 기부금을 잘 내지 않았었기 때문.
일해재단에 기부된 기부금의 대다수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부를 축적했던 보기 드문 기업이었던 국제그룹. 이런 국제그룹은 결국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