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신약 개발'에 앞장선 故 허영섭 녹십자 회장 故 허영섭 회장, 우연히 제약산업에 뛰어들어
[인사이트] 황성아 기자 = 한국 제약회사들이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복제해 판매할 때 홀로 신약 개발에 앞장선 국내 제약사 수장이 있다.
국가 필수 예방접종 백신 3개 중 2개 국산화해 GC녹십자를 백신 전문 제약사로 일군 고(故) 허영섭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실 故 허영섭 회장의 꿈은 '교수'였다. 독일에 유학 중이던 공학도 故 허영섭 회장은 지난 1970년 처음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제약 산업에 뛰어들었다.
유학생이라도 입영을 연기할 수 없도록 법이 바뀌는 바람에 故 허영섭 회장은 독일 유학 중 귀국해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 입사하게 된 것.
의무복무 기간 채우려다 '떠날 수 없는 존재' 돼버린 허영섭 회장
故 허영섭 회장은 단지 의무복무 기간만 채우려고 '극동제약'(녹십자)에 입사했으나 곧 중대한 결정에도 관여하게 되면서 '떠날 수 없는 존재'로 돼버렸다.
이 회사의 대주주는 故 허영섭 회장의 부친이자 개성 상인으로 한일시멘트를 세운 성공한 기업가 故 허채경 명예회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故 허영섭 회장의 부친은 군의감 출신 국립보건원장이던 김수명 씨의 청을 받고 혈액제제 사업에 처음 투자했다.
당시 혈액 관리는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 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전해졌다.
GC녹십자 사장 자리에 오른 허영섭 회장…'필수의약품 국산화' 주력
지난 1980년 故 허영섭 회장은 실력을 인정받고 GC녹십자의 사장 자리에 올랐다. 사장이 된 후 그는 '필수의약품의 국산화'를 목표로 신약 개발에 주력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제약회사들은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복제해서 판매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또 혈액 제제는 의료계에서조차 개념이 생소했고 백신은 수익성이 떨어져 국가 주도 사업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그러나 故 허영섭 회장은 미국과 유럽처럼 한국에서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필수의약품을 우리 손으로 생산돼야 한다고 믿었다.
영업이익 두 배 넘는 돈 '공장' 짓는데 투자
故 허영섭 회장은 '국산화' 꿈을 이루기 위해 당시 영업이익 두 배가 넘는 약 2,600만원을 투자해 경기 용인시 기흥구 신갈에 공장을 지었다.
그곳에서는 '일본뇌염백신'과 'DPT(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백신'을 개발했다. 지난 1971년에는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6번째로 혈액제제 공장을 지었다.
이후 '플라즈마네이트'와 '알부민'등 수입에서 의존하던 필수 의약품을 국산화할 수 있었다.
낯선 사업이었기에 예상보다 많은 공장 건설 투자비가 소요됐지만 이는 곧 GC녹십자가 필수의약품 개발하며 극복할 수 있었다.
'유로키나제'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한 GC녹십자 수출로 매출 올린 GC녹십자…상여금 제공
얼마 후, GC녹십자는 고부가가치 품목이던 혈전용해제 '유로키나제'를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유로키나제'는 사람의 오줌을 정제해 만든 의약품으로 뇌졸중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응급으로 판단될 경우 의사의 처방에 의해 입원한 환자의 혈전을 용해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해외 수요도 많았기에 GC녹십자는 이때부터 수출로 매출을 올리며, 처음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나눠주었다고 알려졌다.
GC녹십자는 수출 호조에 힘입어 지난 1979년 제약사 최초로 수출 1000만달러(한화 약 114억원)를 기록하며, 1982년까지 의약품 수출 1위 자리를 유지한 전설로 기억된다.
B형 간염 백신 '헤파박스' 개발에 성공한 GC녹십자 저렴한 값에 치료 받게 된 국내 환자들
하지만 GC녹십자의 신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GC녹십자는 지난 1983년 12년 연구 끝에 B형 간염 백신인 '헤파박스' 개발에 성공한 것. 이는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였다.
헤파박스 덕에 복십자는 250억원이었던 연간 매출이 528억원대로 훌쩍 뛰었다.
이보다 더 괄목할만한 점은, GC녹십자의 '국산화'로 인해 국내 환자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치료를 받게 된 점이다.
수입가의 약 3분의 1 가격에 해당된다고 알려졌다. 그 덕에 국내 그 덕에 B형간염 보균율도 13%에서 7%로 떨어졌다.
'신약 개발' 박차 가한 허영섭 회장…최초의 민간 연구소 설립
故 허영섭 회장은 같은 해 본격적으로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대주주들을 설득해 최초의 순수 민간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본격적인 연구소는 국가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대였기에 업계에서 많은 관심이 집중됐다.
얼마 후, 故 허영섭 회장이 대주주들을 겨우 설득해 설립한 '민간연구소'에서 예상대로 많은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지난 1988년 유행성출혈열 백신 '한타박스', 1993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 '수두백신', 그리고 2009년에는 '신종플루 백신'이 대표적이다.
"환자 수 적어도 필요하면 의약품 개발하는 GC녹십자"
업계 관계자들은 GC녹십자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질환을 치료하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GC녹십자는 환자 수가 적어 돈이 안 되는 분야더라도 꼭 필요한 의약품이라고 판단되면 개발에 앞장선다고 한다.
앞서 GC녹십자는 지난 1974년 '항혈우병인자(AHF)'를 개발해 환자들을 위해 6년 동안 10만 병을 무상 공급했다.
지난 2012년에는 국내 환자 70여명에 불과한 '헌터증후군' 치료제이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의약품으로 꼽히는 '헌터라제' 개발을 성공했다.
'저렴한 값'에 환자들에게 치료 기회 제공하는 'GC녹십자'
'헌터라제'를 개발한 후 GC녹십자는 기존 치료제보다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에게 치료 기회를 제공하고 국가 건가오험 재정 절감에도 기여했다고 전해졌다.
GC녹십자는 올 상반기 6,359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올해 1조 2000억원을 상회하는 매출을 달성할 것이라고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한편 故 허영섭 회장은 지난 2009년 68세에 타계했다. 그의 주식과 유산 3분의 2는 본인의 뜻에 따라 장학 재단과 연구재단에 기부했다. 가족에게는 3분의 1을 상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녹십자그룹의 경영은 故 허영섭 회장의 동생 허일섭과 故 허영섭 회장의 차남 허은철이 공동으로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