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수)

"삼성 이병철 회장이 '배신' 안했으면 CJ그룹은 효성그룹 자회사로 남았을 것이다"

故 이병철(좌) 삼성그룹 전 회장, 故 조홍제 전 효성그룹 회장. / 사진 제공 = 삼성, 효성


5살 터울 친형제처럼 지낸 두 재계 '거인들'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삼성그룹과 효성그룹이 오래 전에 '동업자' 관계였다는 사실을 요즘에는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것도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故) 이병철 전 회장이 동업자와의 '약속'을 배신(?)한 결과가 오늘날 효성그룹의 '시작점'이 됐다는 일화도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사실 오래 전 재계에서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전 회장과 효성그룹 창업자 고(故) 조홍제 전 회장은 5살 터울이었지만 사실 '친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다.


만우(晩愚) 조홍제 전 회장은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물산공사의 공동 설립자였다.


1950년대 삼성물산공사 시절 창업주 이병철 회장 모습 / 사진제공 = 삼성그룹


1948년 이병철 회장이 무역업을 시작하면서 조 회장이 8백 만원의 자금을 빌려주면서 동업자 관계를 맺었다. 이 전 회장은 2백 만원을 보태 1,000만원으로 출발했다. 당시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병철 전 회장의 형인 이병각 씨와 조홍제 전 회장은 막역한 친구였는데 두 사람은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 동업자가 됐다.


이 전 회장이 먼저 동업을 제안했고 이에 조 전 회장이 흔쾌히 응하면서 삼성그룹과 효성그룹의 '빛나는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나이는 조홍제 전 회장이 5살 위였지만 사업 경험이 풍부한 이병철 전 회장이 사장을 맡았고, 조 전 회장은 부사장을 담당했다.


故 조홍제 전 효성그룹 회장 / 사진 제공 = 효성그룹


사업은 나날이 번창할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두 사업 천재가 손을 잡았으니 더 말할 게 없었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면 돈이 회사로 쏟아져 들어왔다.


삼성이 재계 대표기업에 오른 1958년 어느날 이 전 회장이 돌연 동업을 청산하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지분 정리 문제에 대해 이 전 회장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서로 갈등을 겪었다. 이에 조 전 회장은 출자 지분 비율대로 '8대 2'로 나누자고 했지만 이 전 회장은 30%만 주겠다고 맞섰다.


갈등이 이어지면서 1962년 '13년간의 동업관계'는 마무리됐고 오늘날 CJ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을 조 전 회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이병철 전 회장이 갖기로 합의했다.


故 이병철(좌) 삼성그룹 전 회장 / 사진 제공 = 삼성그룹


그런데 제일제당을 넘겨준다는 이병철 전 회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1965년 한국타이어 주식 50%, 안국화재와 천일증권 주식 등을 받는 것으로 끝내 매듭지었다.


조홍제 전 회장이 회사 이름을 '효성'(曉星)이라고 지은 이유는 별이 3개인 '삼성'(三星)보다 더욱 밝은 회사로 만들겠다는 '각오'와 동업자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동시에 담겨있다고 한다.


효성그룹이 창업자인 조 전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늦되고 어리석을지라도'에는 이러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조 전 회장은 당시 삼성그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대인배' 같은 모습으로 이를 포기하고 사업에 전념했다.


만우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오른쪽)과 회남 송인상 동양나이론 대표이사 회장이 1983년 효성그룹 신년하례식에 참석해 기념촬영하고 있다. / 사진 제공 = 효성그룹


56세에 단독으로 사업을 시작한 조 전 회장은 울산에서 나일론 공장을 차렸는데 섬유 수출이 너무 잘돼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자금으로 한국타이어를 키웠고 대전피혁을 인수하기도 했다.


조 전 회장은 장남인 조석래 회장에게 효성그룹을, 차남인 조양래 회장에게 한국타이어를, 막내인 조욱래 회장에게 대전피혁을 물려줬다.


당시 이병철 전 회장이 약속대로 조 전 회장에게 제일제당을 넘겼다면 지금 CJ그룹은 효성그룹의 자회사에 편입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으로부터 계열 분리한 뒤 오늘날 CJ그룹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삼성그룹 이병철 전 회장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제일제당은 결국 삼성그룹에서 독립했으니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1983년 1월 효성그룹 신년 하례식에서 만우 조홍제 전 회장 일가가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 제공 = 효성그룹


하지만 조 전 회장은 이 전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포기한 일에 대해 "내가 70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결단 중에서 가장 현명한 결단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때로는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요, 버리지 않는 것이 곧 잃는 것이다'라는 역설적인 교훈은 내 후배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고 유훈처럼 남겼다.


재계 두 '거인'이 동업을 청산한지 무려 반세기 이상 흘렀다. 오늘날 두 기업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해 한국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다.


동업자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