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으면 좋겠어
개울 물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 거야
잠 없는 난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 길
풀숲에 담긴 이슬 담을 병 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쭈욱 펴 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시킬 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짝사랑.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해 달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제멋대로 그렇게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방과는 언제든 그 관계가 끝나기 마련이다. 그에게 연인이 생기거나, 그게 아니어도 자연스레 멀어지거나. 이후 당신에게는 아픔만이 남는다.
먼 훗날, 언젠가 우연히 만나면 하겠다며 묻어둔 수많은 말. 용기가 나지 않아 미처 하지 못했던 당신의 진심을 그대로 읊은 시 한 편이 있다.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시인 황정순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래 입맞춤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 그래 보고 싶었거든...
외사랑을 하고 있다면 누구나 꿈꿔보았을 그와의 일상. 아주 나이가 들어서라도, 한 번쯤이라도 펼쳐졌으면 하는 순간. 시는 담담히 이뤄질 수 없는 날들을 노래한다.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 무릎을 베고 오래도록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볼까...?
어쩌면 그때는 창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야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어 울고 싶어
장작불 같던 가슴 그 불씨
사그라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었어...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느니...
사랑하기 너무 벅찬 그 때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
그리고, 그리고 서점엘 가는 거야
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들러
책 한 아름 사서 서재로 가는 거야
난 당신 책 읽는 모습 보며 화폭 속에, 내 가슴속에
당신의 모습 담아 영원히 영원히 간직할 거야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어
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함께 살아보고 싶어
나 늙으면 당신과 이렇게 살아보고 싶어
그가 아무리 노쇠해지고 초라해진다 해도, 언제까지나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지금 당신의 절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