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최근 덕혜옹주의 삶을 조명한 영화 '덕혜옹주'가 누적 관객 수 400만을 넘어서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영화 '덕혜옹주' 는 실존 인물을 다루면서 개봉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자유롭지 못했다.
일제에 별다른 대항을 하지 않았던 덕혜옹주가 마치 독립운동을 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덕혜옹주의 인생은 실제와 얼마나 다를까.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덕혜옹주의 실제 삶을 영화와 비교해봤다.
※ 아래 내용은 구체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1. 영친왕과 덕혜는 실제 망명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
영화 속에서 영친왕과 덕혜를 가장 항일적인 인물로 보이게 만든 것은 바로 이들이 망명을 계획하는 장면이다.
고종의 시종 김황진의 계획으로 상해 망명을 도모하는 장면에서 영친왕과 덕혜는 조선 독립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영친왕과 덕혜는 한 번도 망명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
오히려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 의친왕은 당시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고 있었으며 1919년 11월 상해로의 망명을 기도했으나 안타깝게 실패했다.
2. 덕혜옹주가 강제징용 당한 동포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은 허구다.
영화 속 덕혜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와 일하고 있는 동포들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며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말라는 뜻을 전한다.
이 연설을 계기로 일제에 대한 덕혜의 저항심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러나 관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해당 장면은 덕혜옹주의 망명 계획에 개연성을 불어 넣기 위한 영화적 장치에 불과하다.
실제 덕혜옹주는 조선 동포들 앞에서 연설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3. 덕혜는 한글학교를 세우지 않았다.
영화 속 덕혜는 이우 왕자(의친왕 차남)의 소개로 일본에서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 일환으로 덕혜는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하는 조선 아이들을 위해 일본에 한글 학교를 세운다.
이는 덕혜가 조선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씨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덕혜옹주는 한글 학교를 세운 적이 없으며 독립운동하는 조선 학생들과의 만남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영화 속 이왕직 장관으로 등장한 '한택수'의 실제 이름은 '한창수'이다.
덕혜옹주를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한 영화 속 한택수(윤제문 분)의 실제 이름은 '한창수'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덕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덕혜의 타향살이를 더욱 힘들게 하는 인물로 나온다.
실제 한창수는 일제의 신임을 얻어 조선 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는 이왕직(李王職)의 장관이었다.
그러나 장관으로서 상당히 많은 업무를 도맡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처럼 덕혜만 따라다니며 일일이 모든 행동을 간섭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 덕혜의 조현병 시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보다 더 빠른 18세부터였다.
영화 속 덕혜는 광복 후 딸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입국이 거부된다.
결국 다시 일본에 발 묶이게 된 덕혜는 그 충격으로 정신을 놓게 된다.
영화는 덕혜의 좌절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으로의 입국이 거부된 때부터 조현병 증세가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됐다.
하지만 실제 덕혜는 양귀비(덕혜 생모)가 타계한 다음 해인 1930년(당시 덕혜 나이 18세)부터 이미 조현병 증상이 나타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복순이는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 할머니'를 모델로 만들어진 가상인물이다.
영화 속 덕혜옹주의 곁을 지키며 끝없는 충성심을 보였던 복순이(라미란 분)는 사실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다.
복순이는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 할머니'를 모델로 삼아 만든 가상인물 중 하나다.
실제 변복동 할머니는 복순이처럼 덕혜옹주를 따라 일본으로 가지 않았다.
다만 1963년 1월 26일, 일본을 떠난 지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덕혜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나타난 것은 영화와 같다.
7. 김장한은 두 명의 실제 인물(김장한-김을한)을 결합한 인물이다.
박해일이 연기한 영화 속 '김장한'은 덕혜옹주 곁을 지키며 나중에는 기자가 돼 덕혜옹주의 귀국에 힘쓰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러나 사실 영화 속 김장한은 고종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서울신문 동경특파원 '김을한'을 합쳐 놓은 캐릭터다.
1984년 7월 6일 경향신문에 실린 이방자(영친왕의 아내)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장한은 고종이 직접 선택한 덕혜의 약혼자였으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덕혜와 김장한의 약혼도 무산됐다.
또 김장한의 형 '김을한'은 서울신문사 동경특파원으로 도쿄에 머물면서 처음 영친왕을 만났으며 그 후 20여 년 동안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