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이들이 천사가 되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것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일에 맞춰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이 생생히 담긴 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가 출간됐다. 글은 김숨 작가가 담았다.
길 할머니는 13살이 되던 해, 돈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당시 길 할머니의 아버지는 고물상을 하고 있었다. 도둑이 훔친 물건을 내다 팔았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다.
할머니는 아버지 대신 벌금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도착한 길 할머니 앞엔 예기치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욕정을 풀기 위해 위안소를 드나드는 일본군들. '위안부'로서의 삶을 착취 당한 할머니는 이곳에서 강제 불임시술까지 당해야 했다.
"피가 내 얼굴을 지웠어…. 열네 살이었을까, 열다섯이었을까.
군인이 뱀처럼 긴 칼로 내 머리를 내리쳤어. 정수리에 금이 가더니 피가 솟구쳤어. 내 얼굴을 지우며 피가 흘렀어.
그 피를 닦는데 60년이 넘게 걸렸어"_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pp.22~23
"나를 가지고 놀던 군인은 몇 살이었을까. 문구점에서 산 병아리를 가지고 놀듯 나를. 내 살굿빛 부리를 으스러뜨렸어. 날갯짓 한번 못한 내 날개를 꺾었어.
개나리 꽃잎 같은 내 발가락을 뭉갰어. 내 몸에서 피가 났어. 손바닥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태어나 한 번도 피가 나지 않았던 곳에서. 내가 무서워서 울자 나를 번쩍 들어 공중으로 던졌어.
나는 날아올랐다 군화를 신은 발들 앞에 떨어졌어"_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pp.39~40
책에 따르면 전투를 앞둔 군인들은 종종 길 할머니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염치없게도 그들은 자신이 살아 돌아오길 빌어달라고 말했다.
겁에 질린 군인의 표정을 보고 문득 연민이 휘몰아친 할머니는 살아 돌아오라고 빌어줬다. 동시에 살아서 돌아올까봐 겁이 났다.
전장서 목숨을 건진 군인들은 언제 부탁을 했냐는 듯 더욱더 미치광이처럼 돌변해 할머니를 짓밟았다.
지금도 가만히 있다가 마치 벌이 와서 쏘듯 온몸이 욱신거린다는 할머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몸을 판 여자라는 손가락질이 할머니를 찔렀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 겨우 18살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천안 일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따르며 접대부 일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부끄러움이 밀려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죄인처럼 살았다. 세월이 흘러 일흔하나가 되어서야 할머니에게 '용기'라는 것이 생겼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자신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였다. 당시 최초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보고 길 할머니는 투쟁을 시작했다.
안타까운 건 지금 할머니의 기억이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기억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할머니에게 평안이 깃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 할머니가 겪은 삶이, 그 참혹함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이를 선명히 기록해 역사에 남겨야 한다. 아직 받아야 할 사과가 있기에. 할머니의 유일한 기도처럼 "군인들이 천사가 될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