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김연진 기자 = 섬나라인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신 문물을 수용하고 문화를 교류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적으로 발전하면서 고유의 문화를 꽃 피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가장 가까웠던 백제는 해상을 통해 일본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일본에 불교 문화가 전파됐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국가적으로 불교를 공인한 것은 6세기경 쇼토쿠태자 때부터였다.
당시 쇼토쿠태자는 고구려승 혜자와 백제승 혜총으로부터 불교를 배웠고, 이후 일본을 불교국가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드디어 일본에서 불교문화가 꽃 피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삼국시대의 문화재와 일본의 문화재를 비교하면 흡사한 것들이 많다.
각 국가에서 고유의 문화가 반영되며 문화재에 약간의 양식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보면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일본의 국보 1호라고 여겨지는 '고류지 반가사유상'과 관련된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에 보존 중인 목조 불상이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미소'라고 표현하며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국가적 보물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의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국적 문제를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고류지 반가사유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삼국시대의 양식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거나, 우리나라 도래인(渡来人)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고, 강경한 입장의 학자들은 "오히려 일본의 불상을 한국이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 살펴보자. 일본의 주장이 억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에 고류지 반가사유상에 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이 신라계 도래인이었다" (중략)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
이를 통해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류지 반가사유상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나는 나무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일본은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리나라가 문화재를 약탈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당장 '일본서기'를 들여다보라.
김연진 기자 ji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