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Tuez-les tous! Prends le!(모두 죽여! 다 가져가!)"
조선의 국운이 서서히 기울어가던 1866년. 강화도에서는 침략자의 총칼에 짓밟힌 백성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분노한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공격해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은 병인양요가 일어난 날이었다.
당시 강화성을 1개월여간 점거한 프랑스군은 퇴각할 때 은·금괴와 대량의 서적·무기·보물 등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고 이러한 난리 속에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헌종의 어머니였던 효명세자빈 책봉 당시 만들어진 어책이다.
해당 죽책은 그동안 난리 통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군이 작성한 약탈 문화재 목록에 이 죽책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백 년 넘게 모습을 감췄던 죽책은 지난해 6월 프랑스 경매회사 타장의 경매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프랑스인 소장자가 제시했던 경매 시작 가격은 불과 1천 유로(한화 약 133만원)에 불과했다.
소장자도 경매회사도 그저 흔한 고미술품 정도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직원이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이 죽책을 발견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해당 죽책이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직감한 직원은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을 대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 죽책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가져와야 하는 물건임이 드러난 것이다.
다급해진 재단 측은 문화재청과 함께 프랑스 정부에 죽책의 경매 중지를 요청했다.
죽책의 반환을 위해 6억원 이상의 예산을 책정하기도 했다.
다행히 프랑스 정부는 경매 중지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숨 돌린 재단은 소장자와의 협상을 통해 16만 유로(한화 약 2억 1천만원)에 죽책을 들여오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수수료와 운송비 등을 합쳐 약 2억 5천만원의 금액에 지난달 20일 죽책을 돌려받은 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했다.
15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죽책. 놀라운 점은 죽책의 반환이 리그오브레전드(LOL)로 잘 알려진 게임회사 '라이엇 게임즈'의 기부금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라이엇 게임즈는 그동안 한국의 문화유산 환수를 위해 거액을 아낌없이 내놓곤 했다.
실제로 지난 2012년 문화재청과 문화재 지킴이 협약을 체결한 라이엇 게임즈가 약 6년간 한국 문화유산 보호 및 지원 사업을 위해 기부한 금액은 43억원을 넘어섰다.
또 서울 문묘를 비롯해 성균관 등 주요 서원 3D 정밀 측량, 조선 시대 왕실 유물 보존처리 지원, 4대 고궁 보존 관리 등 국내 문화유산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2014년 1월에는 일제강점기에 반출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 불화 '석가삼존도'를 미국으로부터 돌려받는 데 성공해 역사학계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라이엇 게임즈는 지난해 외국계 기업 최초로 문화유산보호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번 역시 한국의 문화유산 환수를 위해 발 벗고 나선 라이엇 게임즈의 태도는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승현 라이엇 게임즈 한국 대표는 "소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됐던 흥미로운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의미 있는 문화재의 귀환에 라이엇 게임즈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며 담담한 소감을 전했다.
이어 "앞으로도 우리 문화유산 보호와 지원을 위한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황기현 기자 kihyu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