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1987년, 한 무고한 청년이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사고사도, 병사도 아니었다. 반 뼘짜리 창문으로 빛이 간신히 들어오는 고문실에서, 그렇게 앞날이 창창한 서울대생 故 박종철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자칫 묻힐 뻔했던 그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양심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양심과 선택이 모여 진실을 알릴 수 있었고, 이들을 통해 알려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세상이 바뀌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1년 전,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1987년의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을 소개한다.
1. 내과의사 오연상
당시 젊은 의사였던 오연상 내과의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故 박종철 열사의 사망을 처음으로 확인한 인물이다.
오 내과의는 쇼크사라는 경찰의 말과 달리 물에 흥건히 젖어있던 故 박종철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기자에게 알렸다.
양심을 지킨 대가로 이후 오 내과의는 검찰과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가족 생각은 안 하냐"는 협박성 말까지 들었다는 오 내과의는 그럼에도 의사로서의 양심을 버리지 않았다.
2. 검사 최환
1987년 1월 14일 밤. 검사 최환의 사무실에 들이닥친 경찰은 다짜고짜 '빨리 시신을 처리해 달라'고 했다.
경찰은 故 박종철 열사의 유가족이 시신을 화장하길 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문이 있었음을 직감한 최 검사는 경찰의 요구를 무시하고 시신을 보존하고 부검했다.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진실을 포기하지 않은 최 검사는 故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밝혀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 교도관 안유·한재동
1987년 2월 19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근무 중이던 교도관 안유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당시 세간의 시선을 모은 대학생 사망 사건을 알고 있었다.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들어온 경찰 두 명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안 교도관은 손을 떨며 업무일지에 이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사건이 축소·조작됐다는 내용을 담은 업무일지는 당시 함께 근무하던 한재동 교도관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진실을 알리는 비둘기 역할을 한 두 사람이었다.
4.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이부영
1987년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민주 운동가' 이부영은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담당 경찰들과 같은 사동에 수감되면서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다.
이후 몇 달에 걸쳐 동료 김정남에게 故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경위를 담은 쪽지를 작성했다.
쪽지를 쓴 종이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사용하는 누런 갱지였다. 볼펜조차 없어 평소 친하게 지낸 교도관에게 몰래 빌려 써야만 했다.
그렇게 쓰인 쪽지는 위에서 언급된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김 민주열사에게 전달됐고, 이에 비로소 세상에 한 무고한 청년의 죽음이 알려질 수 있었다.
5. 기자 신석호·윤상삼
당시 중앙일보에 근무하고 있던 신석호 기자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경찰 조사 중 사망했다는 사실을 세간에 최초로 알렸다.
신 기자의 보도를 시작으로,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가 故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보도를 이어갔다.
특히 윤 기자는 위 오연상 내과의의 증언을 취재하며 故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을 밝혀내는 데 핵심 구실을 했다.
황효정 기자 hyojung@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