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장영훈 기자 =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고 뜨거웠던 31년 전인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 열사가 서울대 인근 하숙집 골목에서 강제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지고 말았다.
박종철 열사가 구속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된 이유는 다름아닌 학생 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박종운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경찰은 박종운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 박종철 열사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끔찍한 온갖 고문들을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22살 대학생에 불과했던 박종철 열사는 모진 고문 끝에 결국 숨을 거뒀는데 박종철 열사의 사망에 대한 경찰의 발표가 이상했다.
당시 경찰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박종철 열사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 및 축소하려고 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해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지만 당시 중앙일보 기자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또 동아일보 기자가 박종철 열사를 부검한 의사에게 '물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해 보도한 끝에 박종철 열사 사망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다.
박종철 열사 사망에 대한 진실을 알게된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으로까지 이어져 '독재자'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박종철 열사의 희생으로 되찾은 자유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되찾고 싶었던 박종철 열사의 정신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 박종철 열사의 초상과 약력이 적혀 있는 동판에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대의 숭고한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