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지난해 12월 27일 개봉한 영화 '1987'이 새해 첫날 오전 7시경 관객 수 200만을 돌파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화면을 통해 2018년에서 1987년 서울 한복판으로 시간 여행을 선사한다.
관객들의 반응 또한 "직접 그 시대를 살았던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는 자들 모두 알아야 할 이야기",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잊지 않겠습니다" 등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2018년에도 1987년의 그날처럼 생생히 살아있는 이한열 열사에 관한 사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했다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 14일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열사의 사망을 당시 경찰은 "탁자를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해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학가에서는 연일 독재 타도의 대모가 이어졌고 이한열 열사도 뜻을 함께해 시위에 참여했다.
2. 당시 만 20살이었다
1966년생인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을 당시 만 20살로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시위 도중 쓰러져 세브란스 병원에 옮겨진 후 27일 만에 숨을 거뒀다.
3. 뒤통수에 최루탄을 맞았다
1980년대 광주에서 무기가 없는 시민들에게 총과 대포로 맞섰던 것처럼 1987년도 서울에서도 전두환 정부는 시민에게 발포했다.
시위하던 학생들에게 거침없이 발포됐던 최루탄이 이한열 열사의 뒤통수에 맞았고 그가 피 흘리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공개되며 시위는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었다.
4.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이한열 열사는 병원으로 옮겨지기 전에는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없었다.
당시 병원 관계자는 CT 촬영을 위해 금속인 시계를 뺐을 것 같다고 했다.
사촌 형 마대복 씨는 어느 날 식당에서 식사 도중 낯선 청년이 열사의 시계를 보관하고 있다며 "나중에 꼭 갖다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고 아직까지 시계는 발견하지 못한 채다.
5. 쓰러진 열사를 부축한 이종창 씨는 당시 그를 몰랐다
최루탄을 맞고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자 한 남성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아는 사이일 것 같지만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는 시위가 끝나고서야 자신이 부축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고 한다.
6. 사진을 찍은 사람은 우리나라 신문기자가 아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로이터통신 특파원 정태원이었다. 해외신문에 소속된 기자이기에 촬영이 좀 더 자유로웠을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에 사진 협조를 요청했던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에게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는 이종창 씨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며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켜 6월 항쟁의 불길을 지피게 된다.
7. 만화 동아리 회원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한열 열사 역할을 맡은 강동원은 시위 내용을 그린 그림을 연희 역을 맡은 김태리에게 전화번호와 함께 전해준다.
자신의 고민을 글과 그림으로 많이 남겼다는 열사는 실제로 만화 동아리 회원이었다.
8. 운동화는 지금도 남아있다
장준환 감독이 "한 짝의 운동화로 시작됐다"고 할 만큼 이한열 열사가 신었던 운동화는 뜻깊다.
열사의 운동화는 바닥 반이 부서질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지 못했다. 기념사업회의 수소문 끝에 미술품 복원전문가 김겸이 복원을 담당하게 됐다.
이한열 기념관에서는 '운동화 프로젝트' 특별전으로 열사를 기억했다. 소설가 김숨은 'L의 운동화'라는 장편소설로 운동화 복원 과정을 통해 6월 항쟁의 기억을 복기했다.
9. 장례식에 100만 인파가 모였다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100만명 넘게 모였으며 전국적으로는 160만에 달했다. 전두환 정부는 이때도 최루탄을 발사했다.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채운 시위 인파는 망월동 국립묘지까지 함께했다.
장례집회 선봉에는 이한열 열사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영화 '1987'에서 치안본부장 역을 맡은 배우 우현이 섰다.
이 열사 사망 당시 경찰은 사체를 압수하려 했으나 학생들이 지켜냈다.
2015년 이한열 기념관에서는 '운동화 프로젝트'라는 특별기획전이 열렸다.
살짝 만지기만 해도 바닥의 우레탄고무가 삭아서 바스러지는 상태였던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는 우리나라 1호 예술복원가 김겸 선생에게 맡겨졌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세월과 함께 사라진 회사 삼화고무의 타이거 운동화가 운동화 컬렉터에게도 없는 희귀하다면 아주 희귀한 운동화였던 터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28년의 동안 조금씩 낡아져 반 이상 운동화에서 떨어져 나간 신발 밑창 조각들을 하나둘 퍼즐 맞추듯 맞춰나갔고 결국 전부 복원해냈다.
그가 복원해낸 운동화처럼 우리 사회도 탄핵을 일궈낸 '촛불 혁명'처럼 민주화 운동의 옛 기억들을 조금씩 복원해나가고 있다.
지금의 이 평화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도 옛 기억을 보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하영 기자 hayoung@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