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공자 왈 맹자 왈"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사상으로 인해 우리는 과거의 사회가 매우 보수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곤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조선 시대에는 보수적인 사상이 '짙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문란한 사람들은 있었기 마련.
특히 철저한 계급 사회였기에 권력을 이용한 끔찍한 범죄들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보면 깜짝 놀랄 수도 있는 조선 시대 성에 관한 이야기 6가지를 소개한다.
1. 유감동 사건
'성군'으로 불리던 세종대왕 치세에 유감동이라는 여성이 살았다.
그녀는 당시 남편이 있었음에도 무려 39명에 달하는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황희 정승의 아들이었던 황치신 등 고급 관료가 다수 엮어 조정과 사회를 뒤흔들었다고.
2. 부모 상중에 기생과 놀아난 조윤
조윤은 조선의 개국 공신으로 우의정까지 지낸 조영무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날 기생과 동침을 했다가 곤장 100대를 맞았다.
부모가 돌아가면 3년 상을 치르던 시대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일이다.
3. 상투 잘린 이영서
세종대왕 시절 이조 정랑을 지낸 이영서는 벼슬에 오르기 전 남의 아내와 간통했다가 가족들에 의해 상투를 잘렸다.
머리카락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시대에 엄청난 치욕을 겪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후 부하 직원의 첩과 간통하다가 걸려 또다시 상투를 잘렸다.
4. 세자빈 봉씨와 소쌍
조선 시대에는 동성애도 있었다.
특히 궁궐에서 평생 왕만을 바라보아야 했던 궁녀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발견됐다고.
문종의 아내였던 세자빈 봉씨는 '범생이'였던 남편이 자신을 돌 보듯 하자 평소 아끼던 궁녀 소쌍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녀는 소쌍을 침소에까지 들였고, 이를 들켜 폐출됐다.
5. 피임은 창호지로
콘돔이 없었던 조선 시대 종종 이용됐던 피임법은 창호지를 이용한 것이었다.
창호지를 여성의 성기 내에 삽입해 정자를 막는 방식이었다고.
또 천이나 비단, 돼지 창자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6. 어우동(어을우동) 사건
유감동 사건 만큼이나 조선을 들었다 놨던 사건의 주인공이다.
성종 시절 살았던 어우동은 왕실의 종친은 물론 수많은 벼슬아치들과 간통을 일삼았다.
그리고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오른 지 3개월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황기현 기자 kihyun@insight.co.kr